판x윙 동화합작
세기의 대결
By Lapin
“하늘에 사는 온화한 해님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자 샘이 많은 바람은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를 하자고 해요. 해와 바람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으로 누가 센지 내기하기로 결정했어요.”
태초에 박지훈이 있었다.
박지훈. 그를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은 바람돌이(a.k.a 발암돌이).
지훈은 해사한 눈웃음을 주무기로 한 타고난 귀여움 그 자체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든 그가 만났다하면 그에게 마음이 쉽게 사로잡혔다. 동시에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세상 쿨한 가치관까지 갖춘 만인의 연인. 타고난 바람기에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얼굴과 하드웨어와 쿨한 마인드까지. 봄바람 같은 바람기로 사람을 살살 홀린 다음 시베리아 냉기 후려치는 바람으로 상대방을 까버린다는 진짜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바람기에 당한 사람이든, 당한 사람의 지인이든, 혹은 이를 지켜보는 지훈의 지인이든 그와 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의 찌통을 동반한 발암을 유발하는 그는 진정한 K대학의 바람, 바람돌이, 그리고 발암돌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그것은 K대의 떠오르는 태양 때문.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라이관린이 있었다.
라이관린. 떠오르는 태양의 또 다른 호칭은 태양의 신 아폴론(a.k.a 미소년킬러)
태초에 대척점의 위치한 바람과 태양. K대 지훈과 같은 학과 신입생으로 들어온 후배 중에 엄청나게 잘 생겼다는 아이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개강 첫날 건물 전체에 퍼졌다. 소문의 주인공의 어마어마한 외모를 설명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맨눈으로 작렬하는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듯, 그의 얼굴을 제대로 1초 이상 바라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 그의 별명이 태양이라는 것의 단박에 이해시켜버릴 정도의 미모라 했다. 그리고 입학 후 한달이 지났을 때 추가된 그의 별명은 태양의 신 아폴론. K대에 떠오른 새로운 태양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 아폴론과 같이 미소년만을 저격하는 신선한 취향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년이라는 사실이 얼마가지 않아 밝혀졌다.
“지훈아, 너 라이관린이라고 들어봤어?”
“맞어맞어, 걔 올해 신입생인데 진짜 대존잘!!!”
“아폴론 별명도 잘어울려...남신!!”
“...남신은 무슨”
복학하자마자 동기 여자애들의 ‘최신 학교 소식’ 지분의 70% 이상은 라이관린이었다. 지훈은 처음 관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걔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동명이인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름인데다, 그의 이름의 수식어인 ‘대존잘’은 그 라이관린이 지훈이 아는 라이관린임을 확인시켜주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걔가 아폴론이면 나는 제우스다,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이 이렇게 만인이 호들갑을 떨며 찬양하는 K대 아폴론에게 시큰둥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방금 지훈의 제우스 드립이 완전 틀린 말은 아닌게 지훈은 어렸을 때 관린을 업고 키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둘은 부모님들이 대학시절부터 절친으로 지내온 사이었다. 대학 졸업 후, 흩어져 살다 정말 우연히 같은 아파트를 얻은 두 쌍의 신혼 부부는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바로 박지훈과 라이관린이었다.
지훈이 기억하는 관린은 남신은 아니고 그냥 밀가루 인형같은 코찔찔이 남동생일 뿐이었다. 맨날 “형아! 지훈형아!”하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녔던 유난히 피부가 하얀 아이. 지훈 역시 관린을 매우 예뻐했다, 그가 자신의 키를 훌쩍 넘어서기 전까지는. 지훈이 중3이 되면서 관린이 그와 눈높이가 같아졌고, 고등학교 들어가자마자 보란 듯이 관린은 더욱더 쑥쑥 자라 지훈보다 한뼘은 더 커버렸다. 그때 지훈의 기분은... 그 귀염뽀작했던 관린이 그 관린이 아닌거 같다는 것.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나, 굵고 시원시원하게 자란 몸선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아랫배가 뭉근하게 당겨오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훌쩍 커버린 관린을 볼수록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지훈은 관린을 알게된지 17년만에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형, 왜 자꾸 나 피해?”
“내가 뭘...”
“왜 나랑 말도 안해...”
“형 이제 고등학생이잖아. 공부해야지.”
“나랑 같이 공부해.”
“관린아, 형 대학가야지.”
지훈이 대놓고 자신을 슬슬 피하는 것을 관린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대놓고 자신을 피하는 지훈의 방까지 쳐들어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지훈의 뻔한 핑계. 하지만 순진했던 중학생 관린은 지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는 자신이 먼저 지훈을 피해주기도 했다. 지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몇년만 참으면, 형이랑 같은 대학에 가면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겠지, 순진해빠진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훈이 본인이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르게 입학과 동시에 고등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다음해에는 작고 귀여운 후배들을 더 많이 사귀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깜찍뽀작한 순진한 라이관린은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없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의 탄생이었다.
지훈이 고3이 되었을 때 관린은 지훈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훈은 어머니로부터 처음 관린의 입학 소식을 들었다.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관린이 이번에 너랑 같은 학교 입학한다더라’, 하시며 용돈 봉투와 작은 선물이 든 쇼핑백을 지훈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왜 날 줘?”
“니가 가서 전해줘, 축하한다고 하면서.”
“아 왜, 나 바빠. 공부해야해”
“너네 예전에는 죽고 못살더니, 요즘 왜 그래. 오랜만에 인사도 할겸 갔다와.”
“아 엄마...”
“갔다와, 아들?”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의 속도 모른채 밝게 웃으셨다. 지훈은 더 이상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우연히 지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본 것 빼고는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맨날 업고 다녔던 아들 같은 녀석이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건지, 지훈은 관린의 집 대문 앞에서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머, 지훈이가 웬일이야!!!”
“아..엄마가 관린이 입학 선물 전해주라셔서요...”
“아 그랬어? 관린이 지금 방에 있어! 가봐, 이모가 과일 좀 깎아야겠다. 먹고가?”
오랜만에 보는 관린의 엄마는 지훈을 살갑게 반겨주었다. 지훈은 부엌을 지나쳐 쭈빗쭈빗 관린의 방 앞으로 걸어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똑똑똑 노크했다. 그러자 안에서 ‘네’ 하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지랄발광 하기 시작했다.
“...”
몇 년만에 가까이서 보는 관린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여전히 잘생기고 예쁜 미소년이긴 했지만 선이 굵어지고 남성적인 느낌이 더욱 강해진 미남의 모습. 지훈의 작은 손에 자꾸만 땀이 찼다.
“이거, 우리엄마가 너 입학 선물로 주라셨어.”
“...”
“입학 축하한다.”
“....”
“난 가볼게...”
아무 대답없이 자신을 뚱하니 응시하는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쫄았던 건 사실이다. 지훈은 재빨리 뒤돌아서 방문을 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 여전히 엄청 바쁜가보네.”
“?”
갑자기 입을 연 관린의 말에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관린이 빈정대듯 차갑게 웃고 있었다.
“동생이랑 말 몇 마디 나눌 시간도 없고.”
“...”
“대학 가야하니까. 그치?”
자신의 변명을 관통당한 느낌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지훈은 입을 꾹꾹거리며 눈동자만 굴리다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방에서 나와 버렸다. ‘지훈아 과일먹고가!’ 관린이네 어머니가 불렀지만 호다닥 곧장 신발장으로 가 신고 온 삼선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도망이었다.
그 이후로 역시나 관린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입학식 때 강당에서 마주쳤고, 학교에서 종종 마주치긴 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너무나도 잘 알지만 모르는 사람. 그렇게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지는 듯 했다. 어짜피 지훈은 교실과 자습실만 오가는 고3이었고, 1년 후는 졸업이었다. 지훈은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관린과 어색하게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 안심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지훈은 입학과 동시에 동기 여자애 4명이 한꺼번에 얽힌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면서 ‘바람돌이(발암돌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그 외 타과생들과 만나느라 폭망한 학점에 도망쳐 1학년 1학기만 끝낸 후 바로 입대했다. 그래서 다시 복학했을 때 1학년 2학기 수업을 들었어야 했는데, 거기에 라이관린이 있을 줄이야. 2년 만에 들어간 강의실에서 익숙한 뒷태를 발견한 지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쟤가 여기서 왜 나와.
하지만 다행인지 관린은 여전히 지훈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같은 수업이 여러개 겹쳤지만 늘 동기들 주변에 둘러 쌓여있는 관린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것은 지훈이었다. 지훈 역시 관린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자꾸 눈에 띄고 신경이 쏠리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몇 년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서로를 의식적으로 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노력을 얼마가지 못했다. 라이관린이고 뭐고, 신경쓸 겨를도 없이 지훈은 입대전의 명성을 다시 되살리며 복학 후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으로 신입생 여자애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칙칙한 남자들만 가득한 군대와는 달리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신입생 여자애들은 지훈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 꺄르르 상큼한 반응을 보여주었고 지훈의 바람(발암)기질 역시 조금씩 입대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최근에 가장 공들이고 있는 ‘민가영’이라는 단발머리 여자애가 있었다. 가영 외에 연락하는 여자들이 좀 더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많이 쏟는 무용학과 여신. 지훈은 흔히 말하는 ‘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가영도 지훈이 싫지 않은지 지훈의 연락을 적극적으로 받아주었다. 가끔 단대 앞으로 찾아오기도 하면서... 우연히 단과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가영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려 달려가다 건너편 길가에 서있는 관린과 눈이 마주치고는 멈칫, 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냥 늘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들이었다.
[가영아 주말에 뭐해?]
[어 지훈오빠ㅋ 오랜만ㅋ]
어장 안의 다른 물고기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가영과 연락을 못한지 5일째 되던 날이었다. 다른 여자들을 몇 더 만나봤지만 딱히 가영만큼 마음에 가는 사람이 없어 ‘이제 나도 한번 정착해볼까?’ 하는 오만한 생각에 자신 있게 연락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반응이... 아무리 오랜만에 연락했기로니 반응이 너무나도 싸하다. 분명 지난주만 해도 지훈을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 가영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연락해서 삐졌나? 지훈은 단순히 생각했다.
[내가 요즘 바빴지 미안, 주말에 밥사줄게.]
[나 주말에 선약있어ㅋ 됐음ㅋ]
[선약있어? 누구?]
[오빠 나 관린이 만나. 관린이 알지? 연락 그만하자 우리]
...라이관린? 라이관린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냐고.
지훈은 올해 복학 후 강의실에서 라이관린을 만난 것 다음으로 제일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악연인지. 그렇게 피하려고 노력하던 이웃집 동생과 이런 일이 생기다니. 거기다 무려 라이관린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에게 냉대를 받은 지훈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감히 천하의 박지훈을 이런 취급 당하게 만들어? 지훈은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관린의 멱살을 잡으러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어짜피 나도 별로 관심 없었거든? 둘이 지지고 볶고 잘 살든가 말든가,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정신승리하려 했다. 하지만 경영학과 수지도, 컴공과 효민이도, 교육학과 은혜, 디자인대 승아에게도
[오빠, 미안한데 나 요즘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 생겼어.]
[...누군데?]
[미안해. 오빠랑 같은 과 앤데... 라이관린이라고,.]
라는 문자를 받자 지훈은 미쳐버릴 수 밖에 없었다. 뭔데, 진짜 뭔데 라이관린! 지훈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지만 따질 수 없었다. 상대가 라이관린이라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바꾸었다. 여자 아닌 남자로. 그렇다 지훈은 바이었다. 여자를 주로 만나지만 자신의 스타일이라면 남자도 거리낌 없이 만났다. 지훈은 아는 사람의 소개의 소개로 만난 남자 신입생과 썸을 타기 시작했다.
[선오야, 어디야?]
[어, 지훈형. 나 지금 카페!]
[카페에서 뭐해, 우리 선오?]
[나 내년에 형 전공 이중전공 생각있댔잖아. 지금 상담받고 있어.]
[내 전공을 나 말고 누구랑 상담받아?^^]
[형이랑 같은 과라던데.. 라이관린이라고.]
선오의 문자에서까지 라이관린 네 글자를 발견한 순간, 지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발, 라이관린 어딨어, 지금!!!”
선호에게 다짜고짜 전화해 그 둘은 지금 학교 앞 작은 카페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젠 잘 되어가려던 남자 후배까지 건들이려고 하는 라이관린. 대체 왜 이러는거야, 못참아. 콧바람을 씩씩 뿜어내며 찾아간 학교 앞 카페에서, 지훈은 선오가 관린의 맞은 편에 앉아 양 볼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고는 끝내 이성을 잃었다.
“야!!! 너 뭐야?”
지훈은 쿵쿵대며 다가가 관린의 면전에다 대고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하지만 관린은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그는 씩씩대는 지훈의 시선에 눈을 떼지 않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지훈 쪽으로 다가왔다. 강한 숫컷들의 싸움을 감지했던 것일까.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오는 매우 당황한 듯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후다닥 가방을 챙겨들고 카페 밖으로 튀었다. 선오가 밖으로 나가고 카페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관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형”
“...야 너 진짜 뭐하자는 거냐?”
“왜 이제 왔어.”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대꾸하는 관린에게 섬뜩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별명이 태양의 신이라더니. 무슨 고작 스무살짜리한테 이런 포스가... 왠지 모를 1패를 느낀 지훈이 앞니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두번 안물어. 뭐하는거야 진짜?”
“내가 뭐하는거같아?”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자꾸만 지훈 쪽으로 대답을 유도하는 관린의 태도에 점점 더 분노가 차오른 지훈은 차마 한때는 소중했던 이웃집 동생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기 위해 허벅지 옆쪽으로 꽉 손을 붙였다.
“이제 장난질 그만해, 진짜.”
“장난이라니.”
“너 지금 나 엿 먹이는거 모를줄 알았어?”
“형이 날 엿먹인거라고는 생각 안해봤지?”
“씨발. 무슨 소리야, 진짜. 내가 뭘 했다고.”
“...씨발, 진짜 나한테 미안한거 없어?”
냉한 표정의 관린이 이를 물고 대꾸하자 지훈은 흠칫했다. 미안한거라면 자신을 어미오리처럼 졸졸 따르던 새끼오리에 딴맘을 먹고는 곧장 그를 팽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모두 관린을 위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가족같은 동생에게 다른 짓을 할 수 없으니. 하지만 지훈은 이런 말은 하지 못했다.
홧김에 대차게 관린을 찾아갔지만 결국에 그에게 제대로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순진하고 귀여웠던 린린이는 어디간건지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눈을 부라리고 아우라를 뿜어내는 어른 라이관린만 남았다. 지훈은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른채 눈물이 날것 같았다. 관린은 그런 지훈의 상태를 눈치 챈것인지 잘 간 도끼날 같았던 눈을 풀고는 가볍게 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해봐, 잘.”
“서,선오는 건들지마, 진짜.”
“....사과는 나중에 받을게.”
“너 게이도 아니잖아!!!”
“...”
“...”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
“또 보자. 지훈이 형.”
관린은 마지막까지 여유로웠다. 그래도 쟤는 게이도 아니고, 선오는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쟤도 정도껏 알아듣고 장난은 그만 두겠지? 지훈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 유난히 조용했던 학교 앞 골목 구석에서 선오와 붙어있는 관린을 발견하고 나서는 더 이상 지훈도 참을 수 없었다. 말빨로 이길 수 없다면 안타깝지만 남은건 육탄전 뿐이지. 지훈은 생각했다. 자신을 훌쩍 넘은 키지만 빼짝 마르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게, 운동이라곤 제대로 해본적 없는 것 같아 해볼만하겠다. 라는 판단이 빠르게 내려졌다.
“야, 너 이새끼야. 따라 나와”
관린은 그런 지훈을 보고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흠칫 한다거나, 겁을 먹는다거나, 도망간다거나 그 어떤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지훈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골목을 나섰고 관린이 제 입술을 메만지며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봄바람처럼 다정했던 이웃집 형과 햇살만큼 깜찍뽀작했던 이웃집 동생은 더 이상 없었다.
K대 태양과 바람의 매치.
세기의 대결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휑한 거리에 메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날리는 11월의 어떤 날이었다. 두 사람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예전 학교 본관 뒷 마당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다.
“씨발, 누구하나 먼저 옷 벗는 놈이 지는거야, 오늘.”
지훈이 좌우로 목을 꺾으며 생각했다. 라이관린 놈, 키만 멀대같이 컸지 말라빠져서 한주먹거리도 안될거라고. 일단 명치에 제대로 한방만 꽂으면 게임 끝나는거야. 지훈의 동그란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상황이 게임 시뮬레이션 같이 흘러갔다.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관린은 마치 지훈의 수를 다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여유롭다 못해 어딘가 나른해보이는 모습에 엄청난 위압감이 풍겼다. 가까운 곳에서 제대로 전신을 살펴보자 아까 대충 훑었던 것과는 달리 말랐지만 골격 자체가 다른, 굵은 손목 뼈대 위로 비싸 보이는 손목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관린의 굵은 손목뼈 때문인지, 명품 시계 때문인지 지훈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인생은 선빵이야”
예고도 없이 지훈이 작은 키를 활용하여 잽싸게 고개를 숙여 관린의 쪽으로 덤벼 들었다. 하지만 관린은 예상하기라도 한 듯 가볍게 상체를 뒤로 뻗어 지훈의 주먹을 피했다.
“이런 조심조심, 이쁜 얼굴에 상처나면 안되잖아?”
여유를 잃지 않는 관린의 말이 지훈의 화를 더욱 더 돋구었다.
지훈이 재빠르게 다시 상체를 앞으로 세우는 관린의 멱살을 붙들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관린의 큰 손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작은 지훈의 손을 감싸 잡고는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지훈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
지훈은 멱살을 잡은채로 관린의 몸에 바짝 붙어 안긴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다. 관린이 남은 한 손으로 지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내 차례지?”
촉. 관린이 지훈의 이마 앞머리를 거두고는 봉긋한 지훈의 이마에 도톰한 제 입술을 붙였다 뗐다.
“씨발, 뭐하는거야?”
지훈이 예상치 못한 관린의 스킨십에 놀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뭐하는거긴,”
“...”
“벗겨볼라고. 제대로.”
관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란 얼굴로 헤 벌어진 지훈의 입술 사이를 혀를 넣어 파고 들었다. 뜨겁고 축축한 덩어리가 생소한 감각으로 지훈의 입속을 헤집었다. 제 얼굴과 붙어 키스에 집중하고 있는 관린의 감은 눈을 바라보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얘랑 지금... 당황한 지훈이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관린의 팔을 퍽퍽 내리쳤다.
하지만 관린은 보기와 다른 엄청난 악력으로 지훈이 내리치면 내리칠수록 더 세게 지훈의 그러쥐었다. 의지와는 달리 자신의 입속을 파고드는 혀를 자꾸만 감아 훑었다. 강렬한 키스는 두 사람의 코끝이 세게 비벼지면서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생각하는 순간 관린의 얼굴이 떨어졌다. 도톰한 그의 입술이 딸기에 설탕코팅을 한것처럼 붉고, 반지르르 빛났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훈이 지난 몇 년간 왜그렇게 관린을 피했었는지. 왜 제 아들같이 여겼던 관린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는지.
“...내가 결국 이러자고 너 피한줄 알아?”
“그럼 어떻게 하고 싶었는데?”
“넌 내 동생이고, 이모랑 우리엄마랑....”
“볼 자신이 없다고?”
관린은 비웃었고, 지훈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가족같은 사이에 이러면 안되잖아. 관린은 이미 예상했던 말이지만 막상 지훈에게서 진짜로 듣고나니 기분이 개같았다.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준 박지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관린이 지난 몇 년간 생각했던 것이었다. 악착같이 공부해 지훈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그가 만나고 다는 사람들을 다 뺏어버렸다. 복수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지레 겁먹고 도망 가버린 토끼를 다시 제 발로 돌아오게 만들 미끼 같은 것일 뿐.
“이렇게 좆같은게 가족이라면”
“...”
“난 너랑 가족 안해.”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관린이 지훈의 입술을 물었다. 세게 부딪힌 탓에 관린의 아랫니에 집한 지훈의 아랫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비릿한 맛에 관린이 입안 깊숙이 넣었던 혀를 빼내어 지훈의 입술을 햝았다.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목이 탔다. 고개를 뒤로 빼가며 쏟아지던 키스를 피하던 지훈 역시 어느새 그동안 목이 말라왔던 사람처럼 관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모른척, 아닌척 참아왔던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툭.
지훈의 코트가 땅 위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찬바람이 밀고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떠는 동시에 관린의 차가운 손이 지훈의 니트 안으로 파고 들었다.
“차가워..”
지훈이 흐믈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관린이 입술을 붙인채 푸스스 웃었다. 관린이 웃는 숨소리에서 나온 바람이 지훈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이내 지훈도... 웃고 말았다. 관린의 손이 갑자기 훅 올라와 지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찬바람과 차가운 손길에 지훈의 몸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왔다. 관린은 피부에 올라온 돌기를 하나하나 느끼려는 듯 손톱을 세워 살살 긁었다.
“푸흑, 관린아...”
간지러운 듯 이상한 기분에 지훈이 허리를 비틀어 내며 웃었다. 관린이 지훈의 뾰족한 코 끝에 쪽, 입을 맞추며 따라 웃었다. 몇 년이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관린은 급하게 지훈의 손목을 잡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통로로 들어갔다. 둘은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헉헉...
문이 잠긴 옥상 입구에 서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시 입을 맞췄다. 숨 쉴 곳 없는 공간에 갇혀 서로에게서 숨을 찾는 것처럼 간절하게 입을 맞추었다. 입안 깊숙한 곳에서 빨아들이는 듯한 질척이는 소리가 비상구 계단 아래로 메아리쳤다. 달칵. 지훈의 바지 지퍼가 순식간에 열렸다. 지퍼를 걷어내고 그 속에 손을 넣으니 언제부터 그랬었는지 모를 열기가 확 올라왔다. 관린은 웃으며 한 손으로 지훈의 바지를 벗겨내고는 자신의 지퍼도 열었다. 이미 앞섬이 팽팽하게 땡긴 브리프가 보였다.
“여기서는 좀...”
“싫어?”
지훈은 대답 대신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로 입을 비죽였다. 관린이 그 앙증맞은 입을 톡 건들이더니 곧바로 지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고 푹신한 촉감이 목덜이를 꾹꾹 눌러가며 훑고 있었다.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으윽..관린아..”
지훈이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신음하자 참지 못한 관린이 지훈이 입고 있던 니트 속으로 고개를 넣었다. 자신의 몸에 얼굴을 파묻자 온몸을 햝아오는 느낌에 관린의 뜨거운 숨결까지 더해져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은 지훈이 스스로 니트를 벗어던졌다. 붉게 오른 지훈의 맨 몸을 본 관린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셔츠를 후두둑 뜯어내듯 벗어 던졌다.
“...다 벗었네, 지훈형.”
“야...”
“먼저 옷 벗는 놈이 지는 거랬지?”
“너도 벗었잖아.”
아니, 난 이건 입을거라서. 관린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광택이 흐르는 하얀색 네모난 포장지, 사가미 오리지날. 태양의 승리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