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900년 전, 새하얀 얼굴빛에 세상 모든 탐스러운 붉은 과일을 한입 베어문 듯 붉고 붉은 입술을 가진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고 자책하고 학대 했었다. 결국 그 소년은 17살의 나이에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우는 검을 스스로 가슴에 꽂아 생명의 불꽃을 꺼트렸다.

 

 

신은 자신이 만들고 불어넣어준 생명의 삶을 버린 이 소년이 괘씸하기도 가엾기도 하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받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길 바랐다. 그렇게 그 소년은 불사의 몸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졌다.

 

 

사람의 손 때 나, 피가 묻은 물건에 염원이 깃들면 도깨비가 된다. 숱한 전장에서, 수천의 피를 묻힌 검이, 제 주인의 어린 아들에게 넘어가 그 어린 주인의 피까지 묻혔으니 오죽했을까.

 

 

오직, 도깨비 신부만이 그 검을 뽑을 것이다. 검을 뽑으면 무(無)로 돌아가 평안하리라.

 

 

관린은 불사의 몸으로 돌아온 세상에서 흔들렸고 부서졌고 그만큼 단단해졌다. 처음엔 원망을 했다. 후엔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 지독한 벌을 끝내줄 이를.

 

 

 

 

도깨비신부 이야기 作화린

 

 

 

 

불사의 몸이 된지 900년이 되던 그 해 어느 날, 저택 서재에 책을 읽던 중 갑자기 심장이 불에 타듯 뜨거웠고 온 몸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스륵 뜨니 자신은 서재가 아닌 허름한 주택의 앞이었다.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내가있고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까부터 터질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갓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린 아이와 숨이 멎기 직전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 둘 뿐이었다.

 

 

“살려주세요..”

“으애앵-으앵-”

 

 

죽음을 막아 줄 순 없다. 자연의 섭리였고 지켜야 할 법칙이었다.

 

 

“....미안하지만-,”

“이 아이만이라도..제발...”

 

 

여인에게서 눈을 돌려 아이의 눈을 맞추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찔했다. 이 아이는 내가 900년을 찾아 헤맨 아이다.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내야 하는 아이. 도깨비 신부. 순간 번쩍이는 밝고 찬란한 빛에 두 눈을 잃을 것 만 같았다. 귓가에는 푸른 숲속의 햇빛에 부서지는 은빛도 아니고 푸른빛도 아닌 그 어딘가의 색을 가진 나뭇잎들의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나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어지럽게도 섞여 들려오던 소리들이 아득해지더니 두 눈을 앗아 갈 것만 같았던 빛이 훅 사라지는 순간 아이의 엄마는 숨을 거두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죽을 때 까지.’

 

 

 

-

 

 

 

지훈은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귀신이 보였다. 처음에는 귀신인 줄 모르고 말을 걸었다가 큰일이 날 뻔 했었다. 관린은 지훈이 말귀를 알아들을 시기부터 늘 하던 말이 있었다. 절대로 그들이 보여도 봐선 안 되고, 들려도 들어선 안 된다고. 가장 위험한 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귀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깨비 터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조차 들어 올 수 없지만 지훈이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외부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 졌다. 한 해, 두 해가 지날수록 지훈의 음기가 강해져 많은 귀신들이 입맛을 다셨다.

 

 

 

-

 

 

 

언제나 모든 것에 부족한 것이 없게 샤프심 하나까지 다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지훈은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삐뚤삐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쓴 편지를 관린의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둔 날, 저택에 새끼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지훈은 동생이 생긴 것만 같아서 너무 행복했다. 아직 아기강아지라 산책은 어려웠지만 짧은 다리로 지훈을 졸졸 따라다녔다. 잘 때도 함께 잤었는데, 혹시나 뒤척이다가 깔리지 않게 지훈의 침대 가장자리에 누울 자리를 따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강아지와 함께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유전병으로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갔다. 관린은 1분 1초도 지훈의 곁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생에 첫 이별을 겪은 만6세의 예쁜 눈망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

 

 

 

지훈이 10살 쯔음 있었던 일이다. 관린은 항상 지훈을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하교시간에 맞춰 데리러왔다.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게 윙은 조심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날, 보충 수업 일정이 취소되고 마지막 수업이 없어져서 평소보다 1시간이나 하교시간이 당겨졌다. 그 소식은 정해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관린에게 보고되었다. 일을 보고 있던 린은 제 3자가 보기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특유의 나른함을 풍기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린은 나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지훈을 데리러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자신을 기다릴 어린신부를 위해. 하지만 지훈은 호기심대장에 항상 몸이 먼저 움직이는 편이었기 때문에 관린이 저택에서 지훈의 학교로 출발한 그 시각 지훈은 교문을 벗어난 상태였다.

 

 

관린이 왜 항상 데려다 주는지, 왜 데리러오는지 어린아이의 천진함에 순간 망각하였다. 지훈은 신이나 룰루랄라 뛰어도 보았다가 숨이 차오르면 천천히 걸어도 보았다가 길가에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작은 꽃도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가 온 세상을 어린 두 눈 속에 가득 담았다. 그렇게 팔랑팔랑 잘도 뛰어다니다 운동화 끈이 풀려서 쪼그려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물꼬물 끈을 묶어보려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마주보고 쪼그려 앉았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보았고 순간 겁을 집어먹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히익-..ㄴ..누구세요...?”

“너..내가 보이는구나?”

“ㅇㅏ,..아니..그...ㄱ..가방..!가방을 안 들고 왔다! 아휴 가방을 안 들고 왔ㄴ..”

“너 등에 가방, 메고 있는데.”

“.....”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잘해줄게 응? 외로워서 그래. 네가 예뻐서 그래. 니가 날 알아봐 줬잖아. 나랑 가자. 내가 재밌게 해줄ㄱ...아..”

 

 

사탕발린 말들로 자신과 함께 가자던 누군가는 아마도 귀신이었다. 그렇게 속사포로 함께 가자고 말을 걸던 귀신이 갑자기 말을 하다 마니 지훈은 의아해하며 다시 귀신을 쳐다보았는데 귀신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흔들리고 있었다.

 

 

“ㄴ..너..도깨비신부구나....?미안..미안해..진짜 미안해...!!”

 

 

라고 떠들다가 연기처럼 훅 하고 사라졌다. 지훈은 엉덩방아를 찧고 앉은 채로 멍하게 귀신이 있던 자리만 쳐다보고 있다 어깨를 짚는 손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번엔 도깨비였다.

 

 

관린은 본의 아니게 귀신보다 더 놀래 킨 거 같아 다정한 손길로 지훈의 작은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고 지훈과 마주보며 무릎 꿇고 앉아 지훈을 일으켜주고선 엉덩이를 털어줬다. 지훈은 그제 서야 관린의 보호가 없는 세상에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공포와 놀램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작은 몸을 들썩이며 세상 서럽게도 우는 지훈을 품에 꼭 안고 토닥토닥 두드려도 주고 등을 살살 쓸어도 줬다. 그렇게 다정한 관린의 위로에 지훈은 울음이 잦아들었고 관린의 가슴팍은 지훈의 눈물에 젖어들었다. 관린은 지훈이 진정이 되는 거 같아 보이자 슬며시 품에서 떼고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지훈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눈알만 도륵도륵 굴리며 입술을 오물거리다 윙이 접시 깨먹은 강아지마냥 귀가 있다면 축 쳐졌을 거 같은 표정으로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달고 린을 쳐다본다.

 

 

“빨리 보고 싶어서요..”

“내가 갈 텐데..”

“서로 오면 좋을 듯 해서..사실 신이 조금 나기두 했구....죄송해요..화났어요...?”

 

“..화난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

 

 

많이 걱정했다는 듯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짓고 쳐다보는 관린에 지훈이 언제나 받았던 위로와 사랑처럼 고사리 같은 작고 예쁜 손을 들어 올려 관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이제 걱정 끼치는 일 안 할 거야....린..울어요?”

“안 울어. 지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잘못은 지훈이 했는데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는 관린에 지훈은 조금 슬퍼졌다. 슬픔을 낫게 하는 데는 이만 한 게 없지! 하며 관린의 왼쪽 뺨에 한번, 오른쪽 뺨에 한번 뽀뽀를 찐~하게 날려주었다. 뻘게진 얼굴로 얼른 집에 가자며 손을 이끄는 지훈에 관린은 걱정 되고 위험에 빠뜨렸다는 생각에 슬펐던 마음이 치유가 된 듯 다 날라 가 버리고 그 자리에 행복이 자리하고 앉아 관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다.

 

 

 

-

 

 

 

관린은 지훈이 갓난쟁이 때부터 이유 불문하고 항상 볼 뽀뽀를 했다. 어릴 때야 볼 뽀뽀를 해주는 것이 칭찬이고 애정이라 여겼던 지훈은 먼저 뽀뽀해달라고 린의 옷이 늘어지도록 조르고 졸랐다. 하지만 지훈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관린의 여전한 애정 어린 행동은 지훈을 부끄럽게 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부끄러우니 하지 말아 달라 할 수도 없기에 가만히 뽀뽀를 당하고 귀 끝부터 목까지 벌겋게 물들이는 지훈에 관린은 낮게 웃었다. 어릴 때 부터 해왔는데 저렇게 발갛게 물들이는 지훈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욕심이 났다.

 

 

숨길 필요는 애초에 없었지만 굳이 드러내서 지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긴 싫었다. 딱 정해놓은 선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관린의 마음이 성큼성큼 다가갔지만 아이가 놀랠 때면 한발자국 물러나 주었다. 내가 물러난 한발자국 만큼 아이가 다가와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네가 계속 필요하다고 했으면 좋겠어,

사랑 까지 하라고 했으면 좋겠어,

그런 허락 같은 핑계가 생겼으면 좋겠어.'

 

 

 

-

 

 

 

지훈은 관린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그러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다. 수백년을 살아오는 동안 관린의 사람들은 모두 생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갔고, 마지막엔 항상 관린은 혼자였다.

 

 

처음이 아닌 이별에도 관린은 언제나 처음 이별을 겪어보는 사람처럼 아팠고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지훈이 열다섯 쯤 되던 해, 관린의 곁에서 모든 외적인 업무와 내적인 업무를 도맡아 관리하고 지훈을 살뜰하게 보살피던 비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모든 것이 검은 옷을 입은 그날 지훈은 장례식장에서 관린과 저택으로 돌아와 쉬라는 말과 함께 방에 홀로 남겨졌다. 지훈은 아주 가라앉은 관린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관린의 방문 앞에 다다랐을 쯤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꾹꾹 눌러 담아 보아도 자꾸만 흘러넘치는 슬픔이 결국 눈물이 되어 새어나왔다. 지훈은 그 방문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슬픈 눈으로 관린의 방문을 쳐다보다 마치 관린의 등을 쓰다듬듯 손으로 방문을 한번 쓸어내리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관린을 위한 배려였고, 위로였다.

 

 

맑았던 오전과는 다르게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내내 비가 내렸다.

 

 

‘나의 벌은 언제쯤 끝이 나는 것인가. 이렇게도 아끼던 이들을 곁에서 보내는 일이 무척이나 어렵구나. 혼자만 멈춰있는 시간이 참으로 애통하다.’

 

 

 

-

 

 

 

관린은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리고자 안경을 즐겨 썼다. 나른하게 풀린 듯 한 눈매가 인상을 차갑게 만들긴 했지만, 17살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던 그는 그때의 얼굴을 그대로 900년을 살아왔다.

 

 

지훈은 안경을 쓴 관린의 얼굴을 꽤나 좋아했다. 평소에는 끼지 않지만 책을 볼 때나, 일을 보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날에는 안경을 썼는데 그때마다 조금은 낯선 느낌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관린을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일이 잦았다. 부끄러워 눈을 맞출 자신이 없어 그랬다.

 

 

관린은 일을 하지 않아도 앞으로 놀고, 먹기만 해도 될 정도로 부가 넘쳐났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늘 엄격하고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에 본인 소유의 호텔들과 기업들의 업무보고는 항상 받고 직접 날인을 했다.

 

 

한번 씩 회사에 들리는 날인 오늘은 정장을 입고 차가운 인상을 더욱 차갑고 성숙해 보이게 해주는 금테의 안경을 쓰고 한쪽 팔에 코트를 걸치고 막 2층 에서 내려오던 중, 계단 끝에 지훈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서있었다. 관린은 지훈이 너무 귀여워서 계단 난간에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쳐두고 품에 가득 안았다.

 

 

“왜 더 안자고 나와 있어, 지훈.”

“우웅..몇 시에 올 거 에요..?”

“음, 지훈이 아침 먹고, 점심도 먹고 낮잠도 자고 일어나면 아마 와 있을 거 에요”

 

 

품에 지훈을 꼭 안은 채로 등을 크고 따듯한 손으로 토닥토닥 해주었다. 지훈은 평소 관린에게 서 나던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닌 조금 무거운 듯, 시원 한 향수냄새에 가슴이 떨렸다. 지훈은 순간 졸린 기운이 확 달아나고 맘도 모르고 이렇게 스킨십을 해대는 관린에 부끄러워서 죽을 맛 이었다. 쿵쿵 거리는 심장소리라도 들킬까싶어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하는 지훈을 살짝 떼고 내려다보았다. 물결같이 예쁘게 휘어지다 끝이 새초롬하게 올라간 지훈의 눈은 관린을 쳐다보진 못하고 아래쪽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다 관린의 손가락이 지훈의 턱 끝에 닿아 살짝 고개를 들게 만들자 그제 서야 관린의 눈을 마주봤다.

 

 

“지훈......”

“ㅇ..응...?ㅇ..왜애........”

 

 

지훈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킨 건지 아님 얼굴이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빨게 진 건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한 관린에 지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훈...쉬 마려워?”

“...응?”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는 거 같지?? 같이 가줘?”

 

 

고개를 갸웃 하며 애기취급을 하는 거 같은 린에 윙은 목 끝까지 벌게지며 소리를 빼-액 지르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

 

 

 

들킨 줄 알았다, 몸집을 키워가는 사랑을. 사실 조금은 들켰으면 싶기도 했다. 저렇게 까지 몰라주는 관린이 야속하기도 했고 반대로 다행이기도 했고..아니 사실은 알아 줬으면 도 했고 복잡했다. 가랑비에 어깨 젖는 줄 모르고 관린의 애정 속에 흠뻑 취해 다정함과 사랑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으니 언젠간 이렇게 될 운명 이었다. 누구나 다 겪는 사춘기가 온 지훈은 반항의 사춘기라기 보단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되는 사춘기였다. 사랑에 흠뻑 젖어버렸다.

 

 

관린은 지훈의 부모고 형제고 친구지만 지훈이 연인 까지 해달라고하면 그는 다 해 줄 거다. 심장을 달라고 해도 꺼내서 손에 쥐어줄 사람이다 그는. 그래서 더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마음이 부모라서, 형제라서 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로 자신을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모두가 잠든 밤. 자꾸만 커지는 마음에 속으로 앓다 이불을 덮어 쓰고 몰래 눈물을 훔치다가 아차 했다. 자신이 울면 항상 셋을 세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나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여주는 관린을 순간 깜빡했다. 자다 갑자기 이리로 오게 된 건지 두 눈이 나른하게 풀려서는 그 정신에 잔뜩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아..미안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미안하다고 하지 마, 지훈. 내가 미안해 울게 해서 미안해”

 

 

항상 무슨 일이든 자신이 미안하다고 하는 관린이 지훈은 속상했다. 애틋했고.

 

 

 

-

 

 

 

지훈은 처음 겪어보는 부끄럽고 낯선 마음이 두렵다고 관린을 피하고 싶진 않았다. 사랑을 숨기기 위해 관린을 피해 달아나면 저 가엾은 사람이 또 혼자가 될 텐데 그런 건 싫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가 지금 하는 게 사랑인지 동경인지. 그러나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자신에게 만큼은 라이관린 이라는 사람이 내 세상의 전부라는 것.

 

 

지훈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졌고 더 이상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관린에게 한걸음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린, 있잖아. 나 할 말이 있어요.”

“응??”

“린, 놀라지 말고 들어 줘요.”

“알겠어, 지훈. 난 항상 준비 돼 있어. 말해줘.”

 

 

생애 첫 사랑고백을 결심한 소년의 손은 땀에 젖었다. 땀이 찬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바지에 슥슥 문지르는 지훈의 바쁜 손을 보며 관린은 덩달아 긴장해 지훈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당신을.”

“..나도 지훈 많이 좋아해, 마음씨도 곱고 착한 지훈을 누가 좋아하지 않겠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지 몰라.”

 

 

관린은 갑작스런 지훈의 고백에 말문이 턱 막혔다 뒤이어 귀에 때려 박히는 두 번째의 고백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지훈의 보호자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이 오답이란 걸 본인도 잘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그런 거 말구 진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에요. 나 라이관린 당신 사랑해. 아이처럼 품안에 안겨 있는 거 말고 연인처럼 곁에 서서 손 잡구 같이 걷고 싶어요.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고 그게 사랑인걸 알았을 때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멈출 수 없었어. 당신의 웃음 안에서 난 행복했고, 다정함에 눈물 났고, 그래서 욕심이 났어. 날 위해 뭐든 다 해줄 당신이 너무 외롭고 슬픈 사람이라서 이젠 내가 위로해주고 사랑해주고 싶어요.”

“...”

“...”

“...지훈,..난...”

“..나..뭔가 바라고 말한 건 아닌데 조금, 슬퍼질 거 같은데. 근데 나..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아무 대답도 없는 관린에 당황하고 ‘거절당했다.’ 라는 생각에 지훈은 괜히 신경 쓰이고 불편해 할 관린에게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결국 고개를 떨궜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아예 생각 치 못한 건 아니었지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관린의 표정에 당황했고, 그 표정이 가진 의미는 ‘거절’ 이라고 답을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뒤로 돌아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려던 순간 관린이 지훈의 손목을 낚아 채 자신 쪽으로 돌려 세워 힘을 주어 당겨 품에 안았다. 버둥거리며 품을 빠져 나가려는 지훈에 관린은 더 세게 끌어안았고 지훈은 빠져나가기엔 힘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포기하고 가만히 안겨있었다. 얌전해진 지훈에 관린은 팔을 느슨하게 풀고 상체를 뒤로 조금 젖혀 지훈을 내려다 봤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과 벌게진 눈가며, 코끝이며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는 지훈을 이대로 밀어붙여 입을 맞추고 그 안을 헤집고 더 깊은 곳 까지 모두 다 갖고 싶었다. 욕망을 감춰 누르고 관린은 한손은 지훈의 등허리에 한손은 지훈의 한쪽 볼을 감싸 고개를 들게 해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언제나처럼 따듯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관린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더 슬퍼서, 지훈의 두 눈에는 다시 눈물이 차올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관린은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지훈이 너무 가슴 아파 아무 말 없이 슬픈 눈을 하고 지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좋았다.”

"...관린.."

“사랑한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린 그 날 우리는 만났고, 그날 목도 가누지 못하던 네가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눈을 똑바로 맞추던 그 맑고 투명한 네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널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관린은 지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관린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 자신의 입술에 겹쳐지는 관린의 입술에 숨을 순간 집어삼키고선 굳었다. 관린이 입술을 맞댄 상태로 빙긋 웃으며 지훈의 등을 살살 쓸어내려주자 그제서야 지훈이 숨을 내쉬었다. 지훈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도망치려고 한쪽 발을 뒤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관린이 지훈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허리를 휘어잡아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다른 한 손으로 지훈의 뒷목을 잡고 고개를 옆으로 꺾어 깊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가 자신의 혀를 지훈의 발간 입술을 살살 달래듯 훑었다가 톡톡 두드렸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입술을 스르륵 벌리는 지훈에 관린은 조심스럽게 혀를 집어넣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지훈의 혀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관린은 놀랠까싶어 지훈의 혀를 천천히 쓸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살덩이가 부드럽게 휘감았다가 천천히 풀면서 쓸어 내렸다가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었다. 관린의 혀가 들어왔을 때부터 지훈은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꽉 쥐고 굳은 혀만큼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따듯하고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는 관린에 긴장이 풀리고 살짝 실눈을 하고 관린을 훔쳐보려다가 깜짝 놀라며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정하고 따듯하고 온순했던 사람은 어디가고 나른하게 잔뜩 풀린 낯선 눈빛으로 두 눈을 뜬 채로 그렇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린은 히죽 웃었다. 이때다 싶어 바로 치고 들어가 지훈의 혀를 강하게 휘어 감았다가 빨아 당겼다가 쓸어내렸다가 아주 혼을 빼놓는 탓에 지훈은 자꾸만 힘이 빠져 관린의 몸에 매달리듯 기대었다. 관린이 조금 버거워 하는 지훈을 위해 오늘은 이정도만 하기로 하고 입술을 뗐다가 타액에 번들거리며 부어오른 지훈의 입술에 쵹-, 소리 나게 입을 다시 맞췄다 떨어졌다. 숨을 색색 거리며 몰아쉬는 지훈이 너무 사랑스러워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찾는 관린에 지훈은 두 손을 들어 관린의 입을 막아 세웠다.

 

 

“ㅈ..잠깐 타임.”

 

 

온통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당황한 표정의 지훈이 타임을 외치자 관린이 항복한다는 듯 양손바닥을 펼쳐드는 모션을 취하며 한걸음 물러나 주었다.

 

 

“지금..나한테 키ㅅ....아니, 뽀뽀..아니..뭐 한거에요 나한테...?”

“사랑고백. 야하게.”

“...”

“먼저 다가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지훈 울게 했어.”

 

 

지훈은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울게 해서 미안하다는 이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어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고 관린은 그런 지훈을 품에 가득 안았다.

 

 

지훈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안겨온 품이지만 오늘 따라 더 따듯하고 다정한 품이 너무나 행복했다.

 

 

 

-

 

 

 

관린은 지훈을 품에 안은 채로 방까지 뒤뚱뒤뚱 걸어가서 침대에 눕혀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줬다. 그러고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사랑스럽게도 두 볼이 발간 지훈의 모습에 관린은 묘하게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사랑이었다. 관린은 지훈의 앞머리를 가지런히 옆으로 살살 넘겨주며 동그랗고 예쁘게 솟아있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쭉 뻗은 콧날 끝에 앙증맞게 동글동글한 코끝에 입을 맞췄다. 계집애처럼 붉은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그보다 더 붉고 탐스러운 혀가 슬쩍 나왔다가 건조한 입술을 훑고 쏙 들어갔다. 촉촉해져 번들거리는 입술에 관린은 목울대가 한번 일렁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지훈의 눈을 맞췄다. 지훈은 굶주린 맹수 앞에 놓인 초식동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침을 꼴깍 삼켰는데 그 소리가 깊은 밤 고요했던 방안에 꽤 크게 났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는 관린이 잔뜩 긴장한 티를 있는 대로 내는 지훈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피식 웃고는 입술에 가볍게 버드키스를 해주고 잘 자라며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무래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라 더 괴롭힐 수가 없었다. 쿡쿡 웃으며 관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관린이 나가고 지훈은 멍하게 닫힌 방문만 쳐다보다가 이불을 스르륵 머리 끝 까지 올리고선 이불을 팡팡 찼다. 오늘 밤은 길겠구나 싶은 지훈 이었다.

 

 

관린은 자신의 방문을 닫을 때 까지도 첫 사랑을 하는 사랑스러운 지훈의 모습에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지훈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가슴에 꽂힌 검이 우우웅 거리며 공명했다. 검의 울림이 마치 넌 행복해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근데 감히 벌을 받는 동시에 상을 받는 거 같구나. 900년 벌을 받았으면 조금은 행복해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욕심을 내도 되지 않을까.’

 

 

 

-

 

 

 

지훈은 관린과 서로의 마음을 찐하게 확인 한 그 날부터 그전보다 더 부끄러워 졌다. 처음 하는 사랑이라 서툴고 어려워서 어색하기만 한데 관린은 사랑표현을 더 진하게 해오는 탓에 지훈은 언젠간 심장이 터져 죽겠구나했다. 자신은 이제 아기가 아닌데 갑자기 식사할 때나 간식 먹을 때 항상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직접 떠먹여주는 관린에 지훈은 부끄러워서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씻을 때도 들어오려는 관린에 지훈이 제발 이건 혼자 하게 해달라고 빌어서 겨우 떼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나 팔불출인줄은 처음 알게 된 지훈은 그런 관린이 귀엽기도 사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목욕은 안 돼.

 

 

 

-

 

 

 

관린과 지훈은 꽤 오랜 시간 다툼한번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했고,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은 깊어졌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가슴의 통증 또한 깊어지고 심해졌다. 그러나 관린은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지 않았다. 사랑이 너무 소중해서, 이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

 

 

 

-

 

 

 

따듯한 햇살이 넓은 창으로 들어와 마주 선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관린은 희미하게 웃음을 띄우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두 눈에 담았다. 그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직도 첫 사랑을 시작한 그 때처럼 심장이 떨렸고, 두 볼은 붉게 물들었다.

 

 

“지훈,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몹시도 좋았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평범했던 모든 순간들이 너라는 계절 속에서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날이 좋아서 하는 말인데, 너라는 계절 속 적당한 어느 날, 내 신부가 되어 줄래?”

 

 

청혼을 받은 도깨비 신부는 눈물을 터뜨렸고 해사하게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900년을 살아온 도깨비에겐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이토록 오랜 시간, 지독하게 외롭고 슬펐던 영원이라는 벌의 마지막이 다가 왔음을 그들은 알까?

 

 

 

 

 

 

저택의 창고 뒤편, 작은 쪽문을 열고 나가면 메밀꽃이 가득 핀 꽃밭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게 펼쳐져있다. 관린이 영원의 시간을 걷게 되고서 가장 처음 소유 했던 것이 바로 이 메밀꽃이 가득한 꽃밭 이었다. 사시사철 시들지도 죽지도 않는 메밀꽃들이 새하얗게 눈이 덮혀 있는 듯 해 보여 더 어여뻤다. 지훈은 두 발로 걸어 다닐 때 쯤 부터 이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들었다. 이곳은 관린의 품속처럼 따듯하고 포근한 장소였다.

 

 

부모였다가 형이었다가 친구였던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는 이곳에서 조용히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

 

 

 

앞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하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새까만 턱시도를 입은 관린과, 앞머리를 반만 올려 조금은 앳 되 보이고 조금은 성숙해 보이는 느낌으로 새하얀 턱시도를 입은 지훈은 이 세상 누구 보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관린의 손에는 와인 빛의 벨벳소재로 감싸진 반지케이스가, 지훈의 손에는 새하얗고 앙증맞게도 핀 메밀꽃으로 만든 부케가 그들의 결혼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메밀꽃이 가득 핀 꽃밭 한 가운데에 마주보고 서서 사랑을 약속했다. 두 손을 마주잡고 다정하고 따듯한 눈빛으로, 사랑스럽고 예쁜 눈빛으로 함께 할 앞으로의 우리를 위해 미소 지었다.

 

 

관린과 지훈의 입술이 사랑을 전하며 서로에게 닿았을 때, 관린은 순간 검이 꽂힌 가슴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 가슴부근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예쁘게 반짝이던 물결 같은 두 눈을 꼭 감고 발그레한 양 볼이 참으로 사랑스럽던 지훈이 갑자기 쓰러지는 관린에 깜짝 놀라 같이 주저앉았다.

 

 

“어디아파요???왜 그래 뭔데 괜찮아요????”

“아..아니 검이..갑자ㄱ..”

 

 

검이 어떻다고 말을 하던 관린이 정신을 잃고 지훈의 품으로 쓰러졌다.

 

 

 

-

 

 

 

지훈은 관린의 가슴에 꽂힌 검을 잘 안다. 어렸을 적, 지훈은 어린마음에 이것이 무어냐 물어보았을 때 항상 따듯한 눈빛으로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품어주던 관린의 얼굴빛에 아직은 어린 지훈이 이해하기 벅찬 슬픔이 비춰졌고, 지훈은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너무 아파 보여서.

 

그 검에 대한 이야기는 지훈이 조금 컸을 때, 자신이 항상 잠들 때 까지 곁에서 노래를 불러주거나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관린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왜 가슴에 꽂힌 건지, 누가 꽂은 건지, 어떻게 빼낼 수 있는지.

 

 

그 이후의 이야기인 검을 빼내면 관린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 지훈이 관린의 품에 안겨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 가슴에 꽂힌 검이 지훈의 눈에 자꾸 밟혔다. 너무 아파보여서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린, 이 검을 빼내면 어떻게 되는 거 에요?”

“검을 빼내면 용서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불멸의 삶을 끝낼 수 있어.”

“용서 받는 건 알겠는데 ‘불멸의 삶이 끝난다.’ 는 무슨 말이에요?”

 

“그건..이제 더 이상 지훈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거야.”

 

 

 

‘내 벌이자 상인 너를, 내가 떠날 수 있을까.’

 

 

 

-

 

 

 

관린은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 모든 벌이 끝난다는 것이 상이 아니라 결국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지독한 벌이란 것을.

 

 

관린은 다짐했다. 당신에게 나아가 용서를 빌어보겠노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너와 함께 한 내 삶은 따듯했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

 

 

 

관린은 지훈의 손을 잡고 메밀꽃밭으로 갔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메밀꽃밭을 지훈은 방긋방긋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거닐었다. 그런 지훈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다정하게 쳐다보다 관린이 걸음을 멈추고 지훈을 자신과 마주보게 돌려세웠다. 지훈은 갑자기 멈춰 세운 관린을 들뜬 표정으로 쳐다봤다. 관린은 아까보다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지훈을 내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훈아.”

“응??”

“지훈아, 내가..부탁이 있는데 들어 줬으면 좋겠어.”

“부탁?? 무슨 부탁?? 당연히 들어줄 수 있지!!”

 

 

관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훈을 응시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지훈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쥐고 가슴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관린의 행동에 지훈은 놀라서 손을 빼내려고 힘을 줘봤지만 악력차이는 대단했기 때문에 잡힌 두 손을 빼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손아래 겹쳐있는 지훈의 두 손이 덜덜 떨렸고 지훈은 이내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도리질을 쳐댔다.

 

 

“뭐야, 뭐하는 거야..안 돼”

“해야만 해. 지훈 만이 할 수 있는 거잖아. 우리를 위해 해야만 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손 놔줘. 제발..”

 

 

관린은 손이 힘을 주어 검을 빼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는 불꽃들이 튀어 올랐고 극심한 고통에 관린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지훈은 안된다며 소리를 지르고 손을 빼내려 노력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은 아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자꾸만 힘이 빠지는 손을 고쳐 잡고 결국엔 검을 가슴에서 완전히 빼내었다.

 

 

죽음이 관린의 발목을 적시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관린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가슴의 상처에서는 불꽃과 불씨들이 피어 날렸고 지훈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관린은 울고 있는 지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엄지로 살살 아프지 않게 눈가를 쓸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훈, 널 만난 내 인생은 상이었다. 많이 울지 말고, 많이 아파하지 말고, 많이 웃고, 행복하게, 찬란하게.”

“사랑해요..사랑해...가지 마요..제발..나 혼자인거 무서워..싫어”

“나도, 나도 사랑한다.”

“이렇게 나 혼자 두고 떠날 거면 왜 그랬어, 왜 사랑하게 했어. 가지 마, 제발. 제발 그러지마.”

“지훈아.”

“왜..왜 하필 지금이야, 왜 나한테 준비할 시간도 안주는거야..”

“지훈아, 나 봐. 얼굴 좀 보여줘, 응?”

 

 

무너지듯 바닥을 짚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훈이 너무 아파서, 너무 슬퍼서 관린 또한 눈물이 흘렀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관린의 눈을 맞추려던 지훈의 가슴이 무너졌다. 나를 위해 뭐든 다 해줄 사람이, 나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해낼 강하고 큰 사람이 눈물을 보였다. 내 앞에서.

 

 

지훈은 관린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약한 자신이,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못난 자신이 너무나 밉고 그에게 미안해서. 관린은 힘없이 안겨 있다가 지훈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소멸이 가까워진 것이 느껴져 지훈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떼어내 눈물범벅인 내 가엾은 신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로 올게, 첫눈으로 올게. 그것만 할 수 있게 신께 빌어볼게.”

 

 

지훈은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벅벅 문질러 닦고 흐려져만 가는 관린의 얼굴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더듬으며 마음속에 가득 새겼다. 눈 감고도 얼굴을 그려내라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보고 또 봤던 얼굴이지만 감히 잊을까 두려웠다.

 

 

"여기 눈....이거 코.....그리고..입술-..."

 

 

손끝이 관린의 붉고 붉었던 입술에 닿는 순간 관린은 허공으로 불꽃이 되고, 재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허공에 뻗어있는 지훈의 손끝이 덜덜 떨려왔고 이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바로 손만 뻗으면 품에 가득 안을 수 있던 그 자리에, 이 세상 어디에도 관린은 없다. 아무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이 점점 짙어지더니 욱욱 거리며 주먹으로 가슴에 무언가 꽉 막힌 사람처럼 가슴을 내리치며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도 울었다.

 

 

그날 밤, 도깨비는 도깨비 신부의 눈물 속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님과 어린주인님이 이상해 사용인분이 찾으러 왔다가 혼자 쓰러져 있는 어린 주인님을 발견했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눈물범벅에 예쁘고 고왔던 눈은 따가워 보일정도로 뻘겋게 부어올라있었다.

 

 

 

-

 

 

 

‘당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무슨 의미일까.

사랑하는 당신은 이제 없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몇 날, 며칠을 미친 사람처럼 울고불고 그러다 지치면 잔뜩 헝클어진 머리로 그토록 예쁘게 반짝였던 두 눈은 그 빛을 잃고 창가에 기대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렸다.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빗물에 쓸려 내려가 없어질 때 까지도 지훈은 그렇게 말라갔다. 먹지도 잠들지도 않는 지훈이 사용인들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항상 식사 때에 맞춰 방으로 가지고 오지만 힘없이 고개를 젓는 지훈에 침대 옆 탁자 위에 두고 갔다가 두어 시간이 흐르고 나서 빈 그릇을 치우러오면 온기를 잃은 음식이 그대로 있었다.

 

 

돌아가신 비서할아버지의 가문은 대대손손 도깨비를 모셔왔다. 비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서직을 도맡아 왔다. 관린이 검을 빼기로 결심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없어지기 며칠 전, 비서한테 편지봉투를 하나 주었다. 나중에 지훈의 곁에 내가 있어주지 못해서 그래서 지훈이 아파할 때, 그때 대신 좀 전해달라고.

 

 

‘그 때가 지금인 것 같습니다, 주인님.’

 

 

 

-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만 같이 하늘이 잔뜩 우중충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커다란 창문 앞에 나무로 된 의자에 다리를 끌어 모으고 앉아있는 마른 뒷모습에 비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지훈의 옆으로 다가갔다. 지훈은 옆에 누가 다가와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멍하니 창밖 만 보고 있었다. 비서는 품에서 관린에게 전해 받은 편지봉투를 꺼냈다.

 

 

“지훈님, 주인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던 마지막 편지입니다.”

 

 

지훈은 관린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돌려 비서아저씨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어 편지로 손을 뻗었다. 편지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아들고서 지훈은 가만히 편지봉투를 쳐다만 보다 품에 안아들고 고개를 숙이자 지훈의 허벅지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비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방을 나와 주었다.

 

 

지훈은 관린의 편지를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들었다. 언제나 올곧고 바른 사람이었던 그를 쏙 빼닮은 필체에서 그의 향수를 느꼈고, 편지 속 관린은 지훈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박지훈을 사랑한다.’였다. 마지막 쯤 에는 어떤 결정을 하든 라이관린은 박지훈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아주 많이 미안하다고 했다. 이 외롭고 슬픈 사람은 또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지훈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듯했던 이 사람이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길 바랐다.

 

 

소중한 사람들이 이생을 마감하고 떠났을 때 마다 관린은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야한다고, 그게 받은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다짐처럼 이야기 해 주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의 말대로 남겨진 나는 잘 살아야 한다. 그게 그 사람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예의고 영원히 그 사람을 사랑할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훈은 편지를 소중히 접어 다시 편지봉투에 넣고 살며시 입을 맞췄다.

 

 

‘나도 사랑해, 힘내볼게. 내가 사랑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에게 사랑받은 나를 위해서.’

 

 

 

-

 

 

 

저택 어느 곳에도 관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관린의 향기를 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입술이 잘 부르트는 지훈에 항상 손닿는 곳곳에 립밤을 두었고, 발이 답답한 것이 싫어서 슬리퍼를 잘 신지 않는 지훈을 위해 집안 어느 곳에든 폭신하고 부드러운 러그와 카펫이 깔려있다. 빛이 하나 없는 어둠을 무서워하는 지훈이 편하게 푹 잘 수 있도록 지훈의 침실에는 작은 은하수를 담은 무드등과 인형들이 가득하다. 관린이 없는 지금도 지훈은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관린이 사무치게 그립고 그리웠지만 자신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관린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진지 1년하고 조금이 지났다. 나도 관린을 위해 나를 위해 조금 오래 걸렸지만 일상을 되찾고 공부에만 매진했다. 관린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그의 뒤에서 내 곁에서 도와주고 보살펴주시던 사용인분들은 여전히 나를 보살펴주고 저택을 관리해주셨다. 이 또한 관린의 배려였고 사랑이었다.

 

 

그날 이후로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달라진 건 내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줄 사랑이 내 곁에 없다는 것과, 더 이상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도깨비 신부이기 때문에 보였던 것들이 관린이 사라지고서 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관린과 나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더 이상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된 것만 같아서.

 

 

그렇게 보이던 게 보이지 않고 평범한 고3으로 지내며 수시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요 며칠 잠도 자꾸 설치고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귀신들이.

 

 

‘왜일까, 그는 여전히 어디에도 없는데.’

 

 

 

-

 

 

 

2018년 2월 8일, 지훈의 졸업식.

 

 

입춘이 엊그제 같은데 여전히 한 겨울처럼 시리도록 추웠다. 분명 어제 기상청에 따르면 춥지만 맑은 하늘이라고 했는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린 상태였다. 어차피 졸업식은 실내에서 하니 상관은 없었다.

 

 

지훈은 처음으로 혼자 온 졸업식에 유난히 더 슬펐다.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에도, 중학교 졸업식 사진에도 항상 그와 함께였다. 그는 크고 다정했던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정면을 바라보는 항상 같은 자세가 신기하기도 웃기기도 했었는데, 그랬었는데, 이제는 사진을 남길 일이 없다. 사진 속에 덩그러니 혼자일 자신이 너무나도 외롭고 슬퍼서 아무것도 남길 수 없었다.

 

 

10대의 마지막 페이지인 동시에 20대의 첫 페이지인 졸업식을 맞은 교실의 공기는 잔뜩 들떠있었고 어수선했다.

 

 

한사람만 빼고.

 

 

다들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떠들썩했고 지훈은 말없이 혼자 자리에 앉아 창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올 줄 알았는데, 그래서 더 우울했는데 새하얀 눈이 내렸다.

 

 

첫눈 이었다.

 

 

그날 이후 비가 오는 날에는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하루 종일 울었다. 비가 그쳐도 그날 하루만큼은 엉엉 울었다. 평소에는 참아 넘겼던 울음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비로 온다며..첫 눈 으로, 온다며..거짓말쟁이..'

 

 

지훈의 두 눈에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물이 고였을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담임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부모님들이 교실로 들어와 우리 아이들의 졸업을 축하해주며 다들 품에 꽃다발을 안아들었다.

 

 

그런 모습들을 지훈은 말없이 천천히 둘러보며 마지막 교실의 모습을 눈에 담다 책상위에 올려 진 손으로 고개를 떨구고 손끝만 만지작거리며 떠들썩해 들리지도 않을 법한 시계초침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혼자가 된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ㄲ-....

 

 

일정하게 소리를 내며 지훈의 귀를 간지럽히던 초침소리가 갑자기 멈추었고 떠들썩하던 교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다른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이번에도 지훈 혼자만 빼고.

 

 

무슨 일인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당황한 지훈은 눈알만 도륵도륵 굴리며 그 자리에 굳은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쳐다보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교실 밖 복도 어딘가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닫힌 앞문 쪽에서 멈췄고 불투명한 조그만 유리창부분에 사람의 인영이 그늘져 비춰졌다.

 

 

이젠 스스로 자신을 지켜 내야하는 지훈은 불안한 마음과 놀란 마음에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쿵쾅거렸고, 바짝 긴장한 탓에 손바닥엔 땀이 찼다. 지훈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로 앞문만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잔뜩 경계하던 지훈의 두 눈이 커졌고 벌어진 입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따듯한 편이었던 손이 차갑게 식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크게 떠졌던 두 눈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바로 자신의 앞까지 걸어온 인영에 순간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박지훈. 잘 견뎌왔잖아. 이건 꿈이야. 정신 차려.’

 

 

두 눈 가득 찬 눈물이 볼을 타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혼자 울다 지쳐 잠든 밤, 꿈 속 에서 수없이 찾아 헤맨 제일 그립고 원했던 그 다정하고 따듯한 큰 손이 자상하게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짓이겨 문 지훈의 볼에 닿았다.

 

 

“입술, 다쳐 지훈.”

 

 

귓가에 들려오는 따듯한 봄날의 햇살같이 낮고 잔잔하면서 온 세상 다정함을 다 끌어다 모은, 그토록 그리웠던 음성에 지훈은 두 눈을 천천히 뜨며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움에 사무쳤던 사랑이었다.

 

 

“진짜 왔네, 첫 눈 오는 날.”

“졸업 축하해, 지훈.”

도깨비신부 이야기

By 화린 

PanWink's Wonderland

​판윙 동화합작

made by @abg_pw

  • 화이트 트위터 아이콘
  • 화이트의 Google+ 아이콘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