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x윙 동화합작
00.
3월의 학교는 묘하게 들떠있다. 종소리에 맞춰 설렘과 어색함을 머금은 아이들이 각 반으로 흩어진다. 빈 교실의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섰다. 곧 옅은 봄 냄새가 코끝에 걸린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햇볕과 살랑이는 봄바람에 두 볼이 간지럽게 느껴진다.
“오늘 황사에 미세먼지 콜라보라더니, 이상하게 볼이 근질거리지 않냐?”
“... 오르페우스 같은 놈.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 책임져.”
우진이 필통을 들고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어유, 부끄러워. 그걸 진짜 하냐? 대휘가 질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나 역시 얼굴을 가리며 과장스럽게 뛰어갔다. 박지훈 저건 지가 먼저 시작해 놓고-. 뒤에서 우진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홀로 느끼던 봄의 정취가 깨져버린 탓일까. 별안간 몸에 한기가 든다. 교실에 두고 온 체육복 자켓을 다시 가지고 나오기엔 시간이 빠듯하다. 별수 없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양팔을 쓰다듬는데, 어깨 위에 무언가 툭 내려앉았다. 동시에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훅 끼친다.
“추워 보여서. 나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 덥거든.”
체육복의 두 소매 끝을 교차해 리본처럼 묶으며 관린이 말했다. 타인의 숨이 코끝에 닿았다 사라진다. 옅으면서도 강한 그 느낌이 생소해 얼굴을 최대한 뒤쪽으로 당겼다. 뻣뻣해진 몸을 눈치챈 건지 관린이 화들짝 놀라며 멀어진다.
“아, 미안해. 옷이 흘러내릴까 꽉 묶어 준다는 게...”
“아냐. 옷 빌려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고맙지. 벗어둘 곳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흐드러진 목련꽃 하나가 관린의 얼굴에서 피어난다. 해사한 웃음을 떨떠름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따라 올렸다. 야, 라꽌-. 체육 오기 전에 농구 한판 뜰래? 이번에도 우진이 봄기운을 깨며 힘차게 등장했다.
감기 조심해. 내 어깨를 토닥이곤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관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애가 외관은 순정만환데, 내면은 교과서야.”
미안해와 고마워를 입에 달고 살잖아. 저렇게 살기도 참 피곤하겠다. 옆에서 대휘가 혀를 끌끌 찼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농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언제나 그렇듯 첫 골은 관린의 차지였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농구공이 시원하게 골대를 통과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가끔 라이관린을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아. 키 크고 잘생겼지. 성격 좋지. 성적도 좋지.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없달까?”
어릴 적에 구몬 숙제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했을 것 같은 느낌? 쌍쌍바도 정확하게 둘로만 나눠서 먹었을 것 같지 않아?
글쎄. 잠시 고민하다 애매하게 대답했다. 관린의 향이 나는 체육복. 그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라이관린은 진짜 인간이 아니잖아...”
완벽한 그의 특별한 비밀
W. 다소다
01.
첫 만남 때부터 ‘보였다’.
“새 학기의 시작에 맞춰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다. 다 같이 어색한 사이에 서로 잘 지내길 바란다.”
딱딱한 담임의 설명에 맞추어 교실 문을 열고 그 애가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다.
안녕, 나는 대만에서 전학 온 라이관린이야-. 수줍은 인사와 함께 뒤돌아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각 거리는 분필 소리에 맞춰 관린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자, 관린이는 저쪽에 앉아라. 담임의 말에 따라 머리 위의 귀가 쫑긋거린다.
당황스러움에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밑에 핸드폰을 숨겨 게임을 하는 박우진, 열심히 수학 숙제를 베끼는 이대휘. 반 아이들 중 나처럼 토끼 눈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슨 종교적인 이유에서 입고 다니는 의복인가? 아니면 코스프레? 저런 복장에 대해 담임은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애들은? 개취와 다양화의 시대에 내가 너무 뒤떨어진 사고를 갖고 있는 건가?
혼자만 유난 떠는 것 같아 묻지도, 놀라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넘긴 지 벌써 보름째다. 여전히 관린의 귀는 쫑긋하고 꼬리는 생동감 있게 흔들린다.
“너네 관린이에 대해서 뭐 궁금한 거 없어?”
“관린이? 너한테 궁금한 건 있는데.”
치킨 남긴 거 내가 먹어도 돼? 우진이 질문과 동시에 젓가락을 뻗었다. 눈을 감아 잠시 마음의 조정시간을 가진 뒤 차근히 다시 물었다. 아니, 관린이에게 뭐 특이한 점, 없냐고.
“음... 어떻게 그렇게 3개 국어를 잘하는지?”
“말고. 외관상으로.”
“그 정도로 키가 크기 위해선 뭘 먹어야 하는지?”
“말고”
대휘가 짜증이 영근 목소리로 물었다. 너가 원하는 답이 뭔데. 명확하게 말을 해.
진짜 궁금한 게 없어? 정말로?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관린이의 하반신 뒤태. 그걸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
급식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메아리치듯 되돌아오는 목소리와 함께 정신도 제 집을 되찾아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욕을 삼켰다. 일반적으로 친구 엉덩이를 유심히 보진 않지. 대휘가 나긋하게 확인 사살을 시도했다.
02.
“좋은 말로 할 때 앞에 보고 걸어라. 뒷걸음질 치지 말고.”
“내 하반신 뒤태는 절대 안 돼. 변태 새끼”
“아, 좀. 안 봐. 안 본다고.”
우진의 어깨를 주먹으로 두어 대 때리는 시늉을 했다. 우진이 내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내 하반신은 관심 없고 관린이 하반신은 관심 있냐? 그게 더 이상해.
미치겠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짰다.
“걔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잖아.”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른데? 다리 길이?”
“... 됐다”
긴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관린의 꼬리를 깔고 앉는 아이들. 유난히 뾰족한 귀가 시야를 방해할 법한데도 관린을 맨 앞자리에 앉히는 담임. 무엇보다도 일렬로 줄을 섰을 때, 관린의 꼬리가 뒷사람의 몸을 통과하는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비록 하반신 킬러라는 오명을 얻긴 했지만, 덕분에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졌다. 첫째, 관린의 꼬리와 귀는 나만의 허상이다. 둘째, 실존하는 것이나 나에게만 보인다. 두 선택지에서 공통으로 따라붙는 질문은,
왜 하필 ‘우리’인가?
03.
“다들 중학교 때 해봤지? 요놈.”
담임의 칠판에 쓰여진 글씨를 툭툭 쳤다. 환경 미화 대회.
서로 초면은 아닌 거 같으니, 설명은 생략하고. 미화부장이 애들 몇 명 뽑아서 고생 좀 해줘라. 나머지는 청소 깨끗이 하고. 집에 퍼뜩퍼뜩 들어가고. 단체 톡방에서 떠들지 말아라. 이상.
네에-. 착실한 대답과는 달리 아이들은 너도나도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미화부장이 뽑는다는 ‘애들 몇 명’이 나는 아니겠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다들 그렇게, 에라 모르겠다 하며 사는 거구나.
“미화부장 누군지 고생 좀 하겠네.”
“너던데?”
말이 되는 소릴 해. 비웃음을 흘리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대휘가 말없이 출석부를 가져와 눈앞에 들이민다. 봐. 미화부장 박지훈.
“누구 맘대로?”
“담임이 정한 모양이던데? 투표였으면 너 절대로 안 뽑혔지. 너는 미적 감각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잖아. 너 옷 입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걸.”
난 가끔 지훈이의 주먹보다 대휘 너의 세 치 혀가 더 무서워. 우진이 대휘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여튼 고생하고. 힘내라. 파이팅. 기계처럼 다음 대사를 읊은 두 사람은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진다.
좁아진 미간 사이에 짜증이 방울방울 맺힌다. 나도 모르겠다.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다정한 부름이 발목을 잡는다. 지훈아, 집에 가려고? 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교실 뒤편에 관린이 멀뚱히 앉아 있다.
“넌 집에 안가?”
“오늘 환경미화 같이 하려고 했지. 너 혼자서는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중요한 일 아니잖아. 그냥 집에 갈래. 너도 집에 가서 쉬어.”
“그래. 잘 가.”
내일 봐, 지훈-. 빈 교실에 남아 꼬리를 흔들며 인사하는 그 모습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와 겹쳐진다. 신발을 끌며 걸어가니, 텅 빈 복도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린다. 꽤 오랜 시간 거슬리는 그 마찰음을 만들다가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아, 진짜.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흐트러트리고 다시 교실을 향해 걸어갔다. 뒷문 근처 책상에 가방을 던지며 물었다.
“청소 어디부터 시작할까?”
*
“그럼 대만에서 살기 전에는 미국에서 살았던 거야?”
“응. 아버지가 외교 관련 일을 하시거든.”
나는 오른쪽. 관린이는 왼쪽. 창문 하나를 나눠 가진 뒤 창틀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어둠이 살짝 내려앉은 운동장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너는 강아지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시답지 않은 이야기의 시작은 관린이었다.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분홍색을 제일 좋아해?
‘좋아해.’ 둥그스름한 단어가 여러 번 둘 사이를 오고간다. 선호도 조사가 끝난 뒤엔 호구 조사가 이어졌다. 가족은 몇 명이야? 어디서 태어났어?
“나에 대해 관심이 너무 많은 거 아냐?”
농담조로 던진 말에, 정중한 사과가 돌아온다. 아, 불편했어? 미안해.
아냐, 나도 이런 대화 오랜만이라 재밌어. 손사래를 치니 그제야 축 처진 관린의 귀가 쫑긋 살아난다.
“같이 창문 닦으면서 너랑 이런 대화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
“다정하긴 해도 속내를 잘 안 보여주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든. 첫인상도 그... 되게 특이했고.”
특이? 왜? 관린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되물었다. 그냥, 평범해 보이진 않았으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의외였다. 지훈이 너도 첫인상이 평범하진 않았어.
“네 눈, 우주를 담은 듯이 반짝거리잖아. 그래서 처음에 보자마자 느꼈지. 박지훈은 특별한 사람이구나.”
특별과 특이. 두 단어의 간극. 오래 곱씹을 것도 없었다. 가득 채워 사라지지 않는 몽실함 덕에 ‘여운’이란 게 남을 틈조차 없었으니. 서서히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얼굴이 빨개진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망함에 닦은 유리를 다시 문질렀다.
04.
“과자 먹을래? 아까 담임 선생님 생일 파티하고 남은 건데.”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먹었어. 너랑 나만 먹으면 돼. 시야에 불쑥 과자 두 개가 들어온다. 딸기 맛과 초코 맛. 공교롭게도 하나씩 남은 터라 고민하는 내게 다정한 말이 따라붙는다.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그럼 나는 초코.”
초코에 손을 살짝 뻗은 채 관린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관린이 싱긋 웃어 보인다.
“...아냐. 딸기?”
이번엔 꼬리가 아까보다 빠르게 흔들린다. 초코 맛 먹고 싶었던 거구나.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며 딸기 맛을 집었다. 내가 꼬리를 보지 못했더라면, 관린은 좋아하는 것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붕붕거리며 기분 좋음을 표출하는 꼬리와는 달리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니.
나만 아는 비밀이 많아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특별함’ 또한 깊어진다. 문득. 정말 문득. 관린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관린아, 너 늑대지?”
내가 보는 너 또한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05.
‘너 늑대지?’ 무심한 듯 던진 나의 한마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지훈이 왔구나?”
이제 막 교실에 발을 들이려던 나는 그대로 어정쩡히 인사했다. 안녕. 어제보다 좀 더 커진 관린의 꼬리가 반갑다는 듯 흔들린다. 근래 들어 관린은 내가 근처에 다가기만 해도 귀신같이 알아챘다. 후각이 발달해서 냄새로 식별 가능한가? 아니면 내 냄새가 특이한가? 손에 코를 파묻고 킁킁 거리는데,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내 허리를 껴안는다. 조심해. 부딪힐 뻔했잖아.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맴돈다. 앞에 놓인 책상 모서리를 한 번. 그리고 허리를 감싼 관린의 팔을 한 번. 시선을 번갈아 가며 상황 파악을 끝내니, 홧홧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
박지훈, 잘 받아라. 우진이 던진 축구공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헤딩을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머리에 닿는 느낌이 없다. 찝찝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관린아.. 여기서 왜 네가 나와..?
“야, 라꽌. 그걸 너가 쳐내면 어떡해. 우리 팀 골 찬스였는데.”
“지훈이가 위험했잖아. 머리에 공을 맞으면 어떡할 뻔했어?”
“....? 어떡하긴. 헤딩 골 되는 거지.”
요새 왜 그러냐, 너. 박지훈과 관련되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네. 반장이 답답하단 듯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반장의 손을 잡아 저지시키며 달래는데, 손에 관린의 시선이 느껴진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옭아매는 느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동시에 관린이 특유의 체향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숨통을 조이는 기분에 헛구역질이 나온다. 급하게 입을 막은 채 화장실로 뛰어갔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그제야 기분 나쁜 떨림이 가라앉는다. 세면대 거울을 통해 뒤따라온 관린을 마주했다.
“방금 그거 살기지?”
“미안해. 널 위협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럼 누굴 죽이려고?”
“.... 컨트롤이 안 돼”
울부짖음에 가까운 외침 속 생소한 단어를 곱씹었다. 컨트롤? 게임에서 하는 그거? 두뇌는 아직 제자리를 맴돌며 로딩 중인데, 그다음 대사가 입력된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의 향기가 가장 짙고, 너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 온 감각이 너랑 연결되어 있어. 스스로도 지칠 만큼 내 모든 감정의 근원이 너야. 끊임없이 더 많은 특별함을 갈구해. 나만 알고 싶어. 나만 갖고 싶고. 나만 안고 싶어.”
미안해. 미안해, 지훈아. 난 어쩔 수 없는 짐승 인가 봐.
새하얘진 머릿속으로 의미를 그려보기도 전에 관린은 몇 번의 사과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06.
박지훈이 라이관린한테 돈으로 사기 쳤대.
아니야, 박지훈이 라이관린 썸녀를 가로챘다던데?
날씨만큼이나 풀린 입들 덕에 소문은 금방 부풀었다. 애초에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떠한 사연이든 그 뿌리는 단 하나 - 라이관린이 박지훈을 노골적으로 피한다.
“너 뭐 관린이한테 잘못한 거 있어? 진짜 사기 친 거야?”
“몰라”
“그럼 갑자기 관린이가 왜 널 피하는데?”
“몰라”
뒤통수에 대휘의 손바닥이 철썩 와 닿는다. 도대체 아는 게 뭐야. 대답 대신 긴 한숨과 함께 책상에 엎드렸다.
갑자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먼저, 관린의 결석이 잦아졌다. 어쩌다 학교를 나오는 날엔 나를 대놓고 피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가가면 반갑게 뒤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눈빛만으로 벌거벗은 기분을 느끼게 할 때는 언제고. 이젠 손 하나만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냐. 애꿎은 손가락만 책상에 꾹꾹 눌렀다. 위에서 조심스러운 대휘의 말이 이어진다.
“너도 신경 쓰이지 않아?”
“내가 소문에 신경 쓸 성격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아니, 소문 말고.”
관린이.
너 지금도 걔 빈자리만 쳐다보고 있잖아.
*
꽃가루 알레르기는 꽤 유용했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부푼 눈은 아프다는 거짓말을 꽤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교실에 올라가서 좀 쉬면 나을 것 같아요. 잠시 고민하던 체육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아픈 사람처럼 비척이며 운동장을 벗어났다. 텅 빈 복도를 지나 망설임 없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담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귀, 딱 걸렸어.
“우리 얘기 좀 해.”
힘차게 문을 열며 입장하니 관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어버버 거리는 것도 잠시. 널찍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멀어진다. 필사적인 태도에 화가 울컥 치민다. 저게 진짜.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지나 말던가. 심호흡을 깊게 한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너한테 무슨 실수 했어?”
아니. 부정의 대답이 다급하게 따라붙는다. 그럼 평생 나 이렇게 피해 다닐 거야? 이번엔 좀 더 커진 ‘아니’가 되돌아온다. 머뭇거리던 관린이 입을 연다. 미안해. 받는 사람은 전혀 필요없는 사과.
“너는 답답할 만큼 지나치게 모범적이고 이타적이지. 그 이유를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더라.”
인간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들이밀었을 가혹한 잣대. 덕분에 늑대는 어느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생물로 거듭난다. 좋아하는 맛의 과자를 눈앞에 두고도 타인에게 선뜻 양보할 만큼.
욕심을 죄악과 동시하는 관린이 ‘박지훈을 욕심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근데 기왕 용기 내서 고백한 이상, 답은 듣고 가지 그랬어.”
너에게선 소나무 같은 향이 나. 네가 건넨 체육복에서도, 네 책상에서도. 잠깐 집었던 걸레에서도. 후각이 발달된 건 아니지만, 짙은 그 향은 어디서든 너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줘.
네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울림이 커. 다른 사람과 섞여 있을 때, 오롯이 네 목소리에 집중하긴 힘들겠지만 얕게 귓가를 스치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거려.
“보여선 안 되는 게 보이는 사람과 들켜선 안 되는 게 들킨 사람. 애초에 특별함에서 시작된 관계잖아. 더 많은 특별함을 추구하는 게, 뭐. 어때서?”
특별함으로 점철된 관계. 그거 하자 우리.
"꼬리 떨어지겠다. 그만 흔들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어. 지훈이 네 얼굴이 빨개지는 거랑 비슷해."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이 은근 나쁘다"
"특별하게 기분이 나뻐?"
"...이제 그 단어 금지."
마주보며 터트리는 웃음에 옅게 봄 냄새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