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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언젠가, 눈 앞에서 순식간에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말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것이다. 자기 이름이나 겨우 기억하는 천치가 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지훈은 오늘 가게에 나가 향수를 판 돈에서 약간을 떼어 제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곧 다 되었다. 필요한 돈이 얼추 다 모였으니 길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십 년 전의 Rochefort-en-Terre, 지금처럼 땅에 살얼음이 끼면서도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는 11월의 묘한 날씨의 아침에, 얀은 시내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문간에 쓰러져있는 한 동양인 남자애를 발견했다. 빨갛게 언 볼을 한 검은 머리의 아이는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재수없게 연고도 없는 이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던 얀이 제 투박한 검지 손가락을 아이의 조그마한 코 밑에 가져다 대었을 때, 미약한 숨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얀은 그길로 곧장 그 애를 집에 들여 살펴주었다. 아이는 삼일 만에 기력을 되찾았다. 동양인이 여기까지 오려면 분명 밀항을 해서 모르비앙 만으로 흘러들어온 것이 분명했지만 어디서 왔는지, 왜 혼자 여기까지 왔는지 '지훈'이라는 제 이름 외에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가족이 없었던 얀은 지훈을 거둬 키웠다. 자네가 그렇게 인심좋은 사람인 줄 몰랐네 라는 동네 노인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으나 얀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보기 좋게 엿먹긴했지만.

 

얀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고로 가업을 이을 후계도 없었다. 향수를 만드는 일. 얀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조향사였다. 한 번 맡은 냄새는 기가 막히게 기억했고, 매번 손님이 원하는 용도와 향조(香調)에 딱 들어맞는 기막힌 향수를 만들어 판매했다. 경험이 풍부해 향료 소재에 대한 지식도 많았고 향을 채취하고 배합하는 기술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얀은 어느덧 노쇠했고 그의 출중하던 후각과 기억, 꼼꼼함 역시 조금씩 그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해서 후계자 삼을 겸 피도 안섞인 동양인 꼬맹이를 먹이고 입히고 건사했더니 이게 왠걸, 아이는 향료의 세세한 분간은 고사하고 부엌에서 스튜가 졸아 타들어가는 냄새조차 맡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훈이 얀의 집에서 내쫓기지 않았던건, 지훈을 가게의 계산대 앞에 내세우면 향수를 참 잘 팔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절로 향수가 잘 팔렸다고 해야 옳다.

 

동양인인듯도 서양인인듯도 사내애인듯도 계집애인듯도 한 신비한 외모가 단연 큰 몫을 했다. 지훈의 눈동자는 심해처럼 어딘가 모르게 암연한 빛깔이었다. 속눈썹은 길게 드리워져 처연한 인상을 주었으며 고운 눈꼬리는 파도처럼 물결쳤다. 매끈하니 잘생긴 콧대 아래에는 소담한 콧망울이 자리했고 은로가 맺혀 있는듯 반드르한 붉은 입술까지 더해지니 그림이 아닌 사람인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훈을 보기 위해 차츰 가게로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이틀 걸러 한 번씩 낯을 비추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동양인 소년이 파는 향수를 홀린듯이 사들였고, 지훈이 하는 일이라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사과 꽁뽀뜨가 든 사블레를 씹다가 손님이 계산대 앞에 서면 라벨링을 슥 보고서 정가대로 돈을 받는게 다였다. 가게에서 나서는 손님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기실 그 병 안에 구정물이 들었대도 사갈 기세들이었다.

 

그러기를 어느덧 열 번째 해, 오늘도 가게를 닫을 시간까지 향수는 쉴 새 없이 불티나게 팔렸다. 가게의 문을 닫은 후 지훈은 바로 귀가하지 않고 폐허가 된 고성에 들었다. 이 곳에 숨어 기거하는 네즈라는 남자에게 돈을 주면 동양으로 가는 배 표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네즈는 흔히 말해 밀입국 중개의 귀재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지훈은 오늘 이 사람에게 동양으로 가는 배편과 그 배에 오르는데 필요한 삯을 미리 알아볼 참이었다.

 

성 안은 몹시 어두웠다. 뜬금없이 박쥐가 눈앞에 날아 든데도 전혀 이상할 구석이 없었고 천정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으며 벽에 걸린 촛대는 녹슬어 멀리서도 쇳내가 났다. 촛대에 꽂힌 세개의 초는 성 안에 든 불청객을 다그치듯이 일렁이며 쉴새없이 촛농을 만들어냈다. 그나마 그 초가 이 성안에 사람이 있다는 희망이 되어주었다.

 

발하나도 들여넣기 싫을 만큼 을씨년스러운 방들이 양렬로 복도에 주욱 늘어섰고 지훈은 그 방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며 네즈를 찾기 위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그러기를 한참, 문틀에 거미줄이 쳐친 어두컴컴한 방 한 켠에서 마침내 목재 책상에 앉은 그를 발견했다.

 

흑과 백.

 

그는 수묵화로 그린 사람같았다. 흑단같은 머리칼에 흑요석 같은 눈, 그와 대조되는 한겨울 눈처럼 새하얀 피부. 그래서 이름이 네즈(neige)구나.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다리는 몹시 길었다. 그는 순식간에 다가와 지훈의 귓볼을 잡았다. 그리고 귓볼 뒤의 초승달 모양 점을 보았다. 귓볼에 와닿는 숨은 새벽공기처럼 차가웠다.

 

당신이 네즈인가요..?

 

이름을 물으려던 지훈은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얼어붙었고 그는 지훈의 어깨를 턱하니 커다란 손으로 짚었다.

 

"어디로 가시려고?"

 

어깨에 얹힌 손과 지긋이 내리까는 목소리에 한껏 내리눌린 지훈은 자연히 말끝을 흐리게 되었다.

 

"저는 동양으로.."

 

"그러니까. 프랑스 동쪽에 나라가 몇 갠데. 그 중에 어딜 가느냐고."

 

지훈의 본디 국적을 짐작할만한 단초는 몇 없었다. 처음 얀에게 발견될 적에 입고 있었던 옷, 그 때 손에 꼭 쥐고 있던 백옥을 깎아 만든 봉황 모양의 조각, 그리고 그 밑에 새겨진 '지훈'이라는 한자. 그리고 느티나무가 그려진 호박브로치.

 

그 물건들로부터 제 뿌리를 알아내기 위해 지훈은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만들어 질만한 물건들인지 눈에 띄는 사람은 다 잡고 묻기를 몇 년, 어느 새 갈 곳은 꽤나 좁혀졌다.

 

"누르하치가 세웠다는 청나라, 에도 막부가 서 있는 일본, 그리고 그 사이 연화국. 그 세 군데를 들러야해요. 그 중에서 가장 빨리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봐줘요"

 

돈 계산을 하느라 여념이 없어야 할 남자는 대신에 지훈의 앞에 성큼 다가와 손으로 턱을 치켜들어 잡았다. 그리고는 영문 모를 미소를 보였다. 남자의 흰 셔츠 가장 윗 단추에 향해있던 지훈의 시선은 이제 남자의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쏘아보지 않아도 매서운 구석이 있는 눈빛이었다. 심연의 심연까지 꿰뚫릴것 같은 느낌에 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눈맞춤이었다. '내가 누구인가요' 라고 지훈이 묻는다면 그가 곧장 답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배 삯은,"

 

"도착해서 받을거야."

 

여기 있을 사람이 어떻게 뒤늦게 배삯을 챙기겠다는 건지 의아해하는 지훈의 속을 알아채고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목적지까지 동행할거니까."

 

 

 

-

 

일주일 뒤, 첫눈이 내리던 밤에 지훈은 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아무리 얀이 지훈 덕에 마을에서 거진 제일 큰 집으로 옮길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키워준 은혜를 모른 채 할 수 없어 편지도 식탁 위에 두고나왔다. 항구에는 서 있는 배에는 이미 네즈가 올라 타있었다.

 

"이 배를 타면 되는건가요, 네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 손짓을 했다.

 

"이 배를 타면 돼요. 그리고 난 네즈가 아니야."

 

 

겉으로 봐서 전혀 커 보이지 않던 선내는 몹시 넓었고 또 텅텅 비어있었다. 조종실에 선장과 조타수가 있긴 하겠지만 승객은 남자와 지훈 둘 뿐 인듯했다. 객실과 갑판 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그 쪽 이름이 네즈가 아니라구요?"

 

지훈은 아까 전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프랑스에서야 그 이름으로 살았지. 진짜 이름은 사실 그게 아니에요."

 

라이관린.

 

"당신 이름도 내 이름만큼 이국적이네요. 제 이름은 지훈입니다. 아마도..."

 

지훈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문득 이름조차 맞게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이미 조향사 얀의 양아들로 인생의 반쯤을 살았으니 어릴적 일이야 잊어도 좋겠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시작을 알고자하는 미련을 끝내 떨칠 수가 없었다.

 

"본인 이름 소개할 때 아마도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보네요"

 

"사실 가족을 찾아 고향으로 떠나는 길인데, 아는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이 쯤되니 이름도 맞게 기억하곤 있는 건지도 의심스러워요."

 

"아 그렇군요... 긴 여정이 될 겁니다. 두 달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어요. 시간 날 때마다 푹 쉬세요."

 

"관린 씨는 어째서 그렇게 멀리까지 가시는 건가요? 한창 잘 되가는 사업까지 쉬면서."

 

"누굴 좀 만나러."

 

관린은 말을 대충 마무리 짓고 지훈에게 배의 항로에 대해 설명했다. 아프리카의 남쪽을 끼고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갈 것이라 했다. 지훈이 말한 세 나라 중에는 아마 청나라에 가장 먼저 닿을 터였다. 간다고 해도 가족을 찾을 때까지 낯선 곳 낯선 언어들 속에서 얼마를 헤매어야할지 지훈은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관린은 지훈이 묵을 객실의 문을 열었다. 작은 침대옆에 향로가 놓여있었다. 관린은 그 향로에 불을 붙였다.

 

"사람이 장시간 배를 타다보면 숙면하기 힘들어요. 그럼, 곧 미쳐 돌게 되지. 그래서 이게 꽤 쓸모 있어요. 잠이 아주 잘 오거든."

 

그 향 때문이었을까, 지훈은 관린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지훈아, 아가. 달구경가지 않으련?

 

달이 참 밝다. 달이 저리 누르면 풍년이 든다하였는데 올해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구나.

 

왜 사람들은 달에게 소원을 빌지요? 저리 진종일 하늘에 박힌 달이 무슨 힘이 있으려고요.

 

여인은 쉬잇, 하며 검지를 손에 가져다 대었다.

 

달은 늘 너의 염원을 듣고 있단다. 그리고 조심하렴.

 

달의 하얀 품에 안겨 자던 달의 아이가 소원과 맞바꿀 댓가를 가지러 하늘에서 내려 올테니.

 

 

 

일어나니, 온 방에 향기가 자욱했다. 온몸은 맞은 듯이 욱신거렸다. 평소보다 움직임이 더디고 뻐근했다.

 

"확실히 배에서 지내는 게 예삿일이 아니긴 하겠군요. 벌써부터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은게.."

 

지훈의 말을 듣던 관린은 마실 것을 내밀었다. 레몬쥬스였다.

 

"괴혈병에 들지 않으려면 마셔 두는게 좋습니다."

 

그리고는 말붙일 새도 없이 방을 나갔다.

 

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국한되어 있었다. 지루함에 몸을 틀던 지훈이 침실에 있던 책을 하나 펼쳤다. 동화책인가.

 

 

Hijo de la luna

 

옛날 어느 나라에 태자가 태어났습니다. 향후 몇년간 태평성세였습니다. 몇년 째 전쟁도 일지 않았고 흉작이나 역병도 들지 않았지요. 백성들은 그 모든 공덕을 그들의 아름다운 태자에게 돌렸답니다.

 

뭇 백성들의 사랑을 받던 태자에게도 어쩌지 못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궐에 있는 갖은 놀잇감과 매일 반상에 올라오는 진귀한 음식들로도 채우지 못할 외로움이었지요.

 

해가 지면 예동(禮童)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태자는 창을 열고서 휘영청 밝은 달만 한없이 바라다 보았답니다. 달아, 내게도 동무가 있었으면 좋겠어. 해가 져도 떠나지 않고 늘상 곁에 있어주는.

 

첫눈이 내리던 어느 밤, 노루잠을 자던 태자는 이불밑에 바스락거리는 뭔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거기에는 달덩이처럼 뽀얗고 머릿결이 검은 아이가 곤히 자고 있었답니다.

 

얘, 넌 이름이 뭐니. 어째서 여기 있는거야. 예 있으면 경을 친다. 아이의 작은 몸을 흔들며 말하자, 아이는 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류(留). 괜찮아. 아무도 날 볼 수 없어. 너만 빼고. 니가 나를 불렀잖아. 그렇지? 내가 너를 위해 계속 여기 있을테니 너도 답례를 해줄테야?

 

그럼. 그러고말고. 끄덕이는 태자의 볼에 아이는 입을 촉- 하고 맞추었습니다. 매일 잠들기 전에 네 뺨에 입맞추게 해줘.

 

 

아이는 그 후로도 쭉 태자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 아이를 눈으로 볼 수 없었지요. 태자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아이는 별의 가루를 꽃에 뿌려 하루 아침에 꽃이 피게하기도 하고 죽어가며 시름시름하는 토끼를 쓰다듬어 마음껏 뛰놀게 하기도 했으니까요.

 

어느 날 태자는 류에게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난 황제 같은 건 되고싶지 않아. 너랑 매일매일 놀고만싶어. 그러자 류는 답했습니다. 그래 좋아, 그렇게 되게 해줄게. 대신 댓가를 치뤄야해.

 

 

 

이게 뭐야. 지훈은 책을 읽다말고 덮어두었다. 그리고는 갑판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벌써 밤이네. 내다 보는 풍경은 한치앞도 볼 수 없이 검었다. 간간히 반짝이는 물결만 보였다. 마치 별밭을 헤치고 지나는 것 같았다. 그 때 관린이 톡톡 뒤에서 손가락으로 찌르는게 느껴졌다.

 

"부르는데 한참 못들으시길래."

 

"불렀다고요?"

 

말도 안 돼. 코앞에 올때까지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 어리둥절한 지훈을 바라보던 관린은 바람을 맞으며 작은 목소리로 도로 말을 건넸다.

 

"기억도 나지 않으신다면서, 왜 굳이 가족들을 찾으시려는거죠.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려나요. 그래도 꼭 찾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거에요."

 

관린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그러다 지훈 쪽으로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아 이거.."

 

지훈이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본 향수였다. 막상 본인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게 흠이었지만.

 

"드릴까요?"

 

향수병을 내밀자 관린은 냉큼 손을 뻗어 가져갔다.

 

"감사해요. 가족들을 꼭 찾을 수 있기를."

 

 

방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지훈은 아까 읽다 덮어버린 유치한 책을 마저 펼쳐들었다.

 

태자의 탄신일이 되자 온 궐이 들썩였답니다. 비단 옷을 입은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열을 지어 앉았습니다. 무희는 고운 춤사위를 뽐내며 춤을 추고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과 달콤한 축하주를 나누었지요. 그 냄새가 어찌나 먹음직스러웠던지 태자는 신이 나서 내도록 발을 동동거렸답니다.

 

그 때, 연회장의 문을 부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칼이 스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태자는 자신을 이르는 류의 손을 잡고서 정신없이 달렸지요. 류, 어쩌면 좋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어찌해.

 

한참을 달리다 멈춰 섰을 때, 달빛 아래 류의 천진한 눈빛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류는 새빨간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어요. 네가 황제가 되기 싫다고 했잖아. 난 네 소원을 들어줬어. 이제 넌 내 청을 들어주어야 해. 넌 나의 반려가 될거야. 그 말을 들은 태자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답니다.

 

태자는 이제 더 이상 태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왕조가 바뀌고, 황제와 황후는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요. 태자는 절망했어요. 그래서 류에게 말했습니다. 너 따위는 가버려. 보고 싶지 않아. 류는 크게 상심한 얼굴로 태자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좋아, 하지만 이전의 약속이 유효하니 영원히 사라져줄 순 없어. 너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줄게. 그리고 이 소원의 댓가로 난 네 기억을 가져갈거야. 넌 날 기억할 수 없을거야, 지훈아.

 

 

지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떨리는 온몸을 이불로 감싸고 수분간 있다가, 조심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왠지 모르게 시야가 흐릿했다. 갑판 위에 올라섰다. 바다는 여전히 검고 물결은 여전히 반짝인다.

 

"지훈 씨, 여기서 뭐해요?"

 

지훈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도망칠 생각이라면 그만둬요. 이 배가 아직도 바다 위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하늘길. 우리는 월궁으로 가고 있어요. 거기가 내 집이거든. 아 이번에도 소원은 들어줬어요. 거기가면 가족들이 모두들 있을거야. 관린은, 네즈는, 그러니까 류는, 빙긋 웃었다.

 

흠 그나저나, 조금씩 전신의 감각이 무뎌지는걸 보니 지훈 씨는 달과 가까이 지내기 조금 힘든 '체질' 인가봐. 하긴 어릴 때도, 나를 곁에 두는것 만으로도 후각을 잃었었잖아요.

 

눈에 띄는 속도로 시야가 캄캄해졌다.

 

"관린, 나 너무 무서워요. 내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줘.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응?"

 

달에게 소원을 빌 땐 조심해야한다, 아가야.

 

관린은 다가와 지훈의 입술을 들이마시듯 빨아 물었다.

 

"좋아요. 그렇지만 댓가를 치뤄야지. 오늘 나랑 초야를 치뤄요. 하지만 이번엔 선택권을 줄게."

 

관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든 감각들이 돌아왔다. 지금 하늘 위를 떠도는 배처럼, 관린의 혀가 온 입 속을 떠돌았다. 그 느낌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워 모든걸 또다시 잊을 지경이었다.

 

"내가 지훈에게 처음으로 소원을 빌게요. 당신의 첫날밤을 나에게 줬으면 좋겠어"

 

지훈은 대답 대신 관린의 목에 양팔을 둘렀다. 달근하고도 시원한 향이 코를 찔렀다. 이걸 향수로 만들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텐데 얀이 아쉬워하겠군. 잠시간 머릿속을 떠돌던 잡념은 옷 속의 살결을 더듬는 관린의 손길에 곧 잊혀졌다.

 

 

 

달의 아이여, 당신은 왜 하필 저에게로 왔나요.

 

나는 애초에 당신에게 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제 이름의 류는 머무를 류, 네즈 (Neige)는 당신에게 처음 왔던 날 내리던 눈이지요.

 

그리고 당신만이 아는 진짜 이름인 관린은, 당신에게 드리는 제 마음의 징표입니다. 살의를 담아 제 이름을 부르면 언제든 저를 소멸시킬 수 있어요. 제 생명은 온전히 지훈의 것입니다.

 

관린, 제가 또 소원을 빌어도 되나요? 혹 당신을 그렇게 부르더라도 절대 사라지지 말아주세요. 늘 함께 있기로 오래전 약속했잖아요.

 

그렇다면 댓가는 준비되어있겠죠? 당신의 모든 밤들을 저에게 주시는 걸로.

 

 

 

 

아가. 달에게 소원을 빌면 달의 아이가 내려와 반드시 그 소원의 댓가를 가지고 간단다.

Hijo de la luna

By 사막별

PanWink's Wonderland

​판윙 동화합작

made by @abg_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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