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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친절한 행동: 상대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놓도록 한다.
 
지훈이 간절히 소망하는 게 뭘까. 뭐, 일단은 그 그림이 있겠지. 진짜 말만 하면 줄 수 있는데. 저녁 산책 시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오는 지훈이 유난히 신경 쓰인다. 지금 관린의 머릿속에는 상대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가득 차서 상대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내놓도록 한다는 뒷 구절은 지워진 지 오래다.
 
존스는 틀렸다. 호감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상대방을 제대로 바라보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방법을 써놨다. 지훈의 호감을 사기 위해 던진 몇 가지 칭찬의 말에 즐거워하는 모습이 계속 보고 싶어져서 좋은 말말 해 주게 된다. 상대가 듣고싶어하는 말을 해 주기 위해선 상대를 먼저 파악해야된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 저것 물어봤고, 거기에 대답하기 위해 곰곰히 생각하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예상치 못한 엉뚱한 대답이 나와서 자신이 웃게 될 때 마다 쑥쓰러워하는 표정도 좋다.
 
자신을 잘 표현하기 위해 꺼낸 몇 가지 말에 한 걸음 더 나가서 스스로 몰랐던 모습을 알려준다. 박지훈이 나를 저렇게 보고 있었나 싶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게 꽤 괜찮은 모습들이라 더 잘 보이고 싶어진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끝났구나 싶은데 친절한 모습까지 보여주란다. 자신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할 때 마다 기뻐하며 얼굴을 붉힌다. 친절로 환심을 사는게 아니라 친절함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이상을 생각하게 된다. 존스라는 작자는 틀려먹었다. 결국, 지금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는 지훈이 옆으로 와줬으면 좋겠다까지 와버렸다.
 
“박지훈씨.”
 
지훈이 저 만큼 뒤에서 대답한다. 네!
 
“옆으로 와요. 같이 걸어요.”
 
생긋 웃으며 옆자리를 차지한다. 잠시 걷다가 정원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자 지훈도 옆에 앉는다.
 
“여름이 끝나려나 봐요.”
“그래요?”
“새벽이랑 밤에는 바람이 불어요.”
 
지훈이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정말 바람이 부는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린다. 관린도 지훈을 따라 손을 내밀자 손가락 사이로 가벼운 바람이 지나간다.
 
“새벽에 안 추워요? 어제 창문 열어놓고 잤는데 추워서 새벽에 깼어요.”
“난 더위도 추위도 잘 못 느껴요.”
 
이럴 때, 새삼스럽지만 관린이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평소라면 어색함을 느끼고 다른 말을 찾았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까지 본 관린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선물에 기뻐하고,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가까워지고 싶다며 서툴게 다가오고 이렇게 옆자리를 내어준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포시 웃더니 이내 하늘을 보고 있는 옆모습 넘어 조금씩 차오르는 달이 보인다. 이제 또 며칠 뒤면.
 
“곧 보름달 떠요.”
“그러네요.”
 
한 번뿐이지만 지훈은 분명 봤다. 늑대로 변한 관린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도련님은 어떤 기분일까. 갑자기 그 때 도망가지 말 걸 하고 후회가 된다. 놀랐지만, 무서웠지만 참고 옆에 있어 줄걸. 그럼 혼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옆에 있어 드릴게요.”
 
관린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자 지훈은 기분에 취해 말실수 했나 싶었다. 그래도 도련님한테는 숨기고 싶은 일인데, 내가 너무 쉽게 말했을까.
 
“혼자 밤새 아픈 거보다는 옆에서 도와드릴 게 있으면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무서워요?”
 
지훈은 자신이 무섭지 않냐고 묻는 눈과 말에 많은 게 담겨있다고 느꼈다. 하나씩 풀어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무서웠는데 괜찮아요.”
“왜요?”
 
왜일까.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처음에 도망가려던 나는 겁도 없이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하는 걸까? 대답 없이 관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 마리 로랑생의 자화상을 떠올렸다. 유려한 선으로 그려진 얼굴이 아프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었다. 이젠 그 얼굴이 자신에게 묻고 있다. 무슨 대답을 해줘야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얼굴을 웃게 할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 순간 지훈은 입술이 물어뜯긴다면 이런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단순히 입술이 핥아질 뿐인데 입술뿐만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이 핥아지는 것 같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경함.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열린다. 늑대라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까? 다시 혀를 빼는 것이 힘들 정도로 세다. 자신도 모르게 혀끝을 움직여 치아 뒤쪽을 쓰다듬자 뾰족한 송곳니에 닿는다.
 
혀의 움직임이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멈출 수가 없다. 키스가 이런 거구나. 가장 쉽고 단순한 형태의 인사임과 동시에 나를 열어 상대를 맞이하는 행위구나. 짐승의 악력은 부드러웠지만 강하구나.
 
관린은 인간과 입술이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촉촉함이 신경의 말단까지 퍼져 숨죽이고 있던 온 몸의 세포들이 움직인다. 부드럽고 느리고 촉촉하다. 자신을 보는 지훈의 표정이 촉촉하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 그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자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부드러운 점막이 마찰했다.
 
어느새 애가 타서 손목을 잡자 관린이 웃는다. 머리는 이제 떨어져야 한다는 걸 아는데 몸은 모른척한다.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나면 자신도 꼭 짐승이 될 것 같다. 입술을 떼고 고개를 숙여 목을 물었다. 마치 관린이 인간이고 자신이 늑대가 된 것 처럼. 관린의 목울대가 움직이는게 느껴진다. 떨려오는 입술도, 맞잡은 손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관린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자신과는 다른 체온도 정확하게 다가온다.
 
감고있던 눈을 뜨자 자신을 보는 지훈의 얼굴이 가득 찬다. 하이더는 애정에 불균형이 생기면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상대에서 보상하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강조했다. 관린은 지훈과 자신의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얼굴과 시선이 나를 떠날까 봐 불안해졌다. 그래서 지훈에게 뭐든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훈은 간만에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문자의 90%는 찰리다.
 
[벨, 잘 하고 있냐?]
[이 자식아, 왜 연락이 안 돼]
[야, 너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그 이후로도 이어지는 시시껄렁한 욕설과 협박. 지훈은 핸드폰을 쥔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법 같은 일들이 생기는 마법 같은 곳에 있다보니 자신이 잠깐 꿈을 꿨나 보다.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있고, 밖에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꿈 꾸라며 이불을 다독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어제밤의 관린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이런 일 따위 안 하고 그냥 평범하게, 착하게만 살았으면 좀 달랐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는 일 따위 안 해도 됐을텐데. 아니다. 이게 아니었으면 애초에 관린을 만날 수 없었겠구나. 성 안으로 들어와야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인데 아무것도 아닌 평범했던 나는 성 안으로 들어올 자격 조차 없었을테니까. 갑자기 차오르는 우울감에 빠지려는는 찰나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는 찰리. 지훈은 한참 화면을 쳐다보다 끊길것 같지 않은 전화에 한숨을 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제야 받네. 너 어떻게 된거야?
“좀 바빴어요.”
- 왜, 감시가 심하냐? 어렵겠냐?
 
지훈은 찰리가 들을 수 없도록 수화기를 막은 후 웃었다. 감시라니. 감시 한번 받아보고 싶네. 제대로 달라지는 거라고 한 이후 관린은 점점 지훈에게 모든 영역을 오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꿈같이 느껴지던 생활이 좋았는데 모든 걸 보여줄수록 지훈은 점점 힘들어졌다. 부담 때문은 아니다. 드디어 죄책감이 시작 된거다.
 
“찰리,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 뭐?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이새끼야, 이게 얼마짜리 일인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벨, 너 왜 그래. 설마 너 들켰냐?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걸렸으면 좋겠어요. 지훈은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며칠 전, 두 번째로 늑대로 변하는 관린을 봤다. 해가 질 때 쯤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고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린은 아무렇지 않게 책을 마저 보기 시작했고, 달이 뜨자 길게 늘어진 창문 사이로 세어 들어 오는 빛 줄기에 지훈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순간 무딘 칼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낀 관린의 몸이 크게 휘어 지졌고, 이를 악 물며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 잡고선 지훈을 향해 나가라는 듯 방문을 가리켰다.
 
순간, 새하얀 피부에서 은회색의 윤기 나는 털이 쏟아져 나오더니 관린의 전신을 휘감았고 방문을 가리키던 정갈한 손이 날카롭고 뾰족한 짐승의 발이 되었고, 조금 전의 늘씬한 팔다리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찡그린 얼굴은 순식간에 변하고야 말았다. 야수가 네발로 선 채 힘겹게 숨을 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걸 본 지훈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아팠겠다였고 입 밖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괜찮냐는 걱정이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는지 뚜렷하게 기억 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놀라서였을 뿐이지 끔찍하다거나 소름 끼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었다. 뼈 마디마디가 일그러지고 살점이 모양을 바꿔 가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던 그 모습에 슬펐을 뿐. 그리고 다가가 조심스럽게 털로 뒤덮힌 몸에 손을 올렸다. 멈칫거리던 손이 이내 부드럽게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손 끝과 짐승의 가죽 사이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따뜻했다. 손의 떨림이 완전히 잦아지고, 그 순간 관린은 생애 처음으로 왜 인간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옆에 있는 지훈을 안고 싶었는데 손 대신 발이 나가서 생각지도 못하게 지훈을 넘어뜨린 채 타고 올라가는 모양이 됐다.
 
그렇게 밤이 지났고, 달도 떠났다. 다시 눈을 뜨자 옆에 잠들어 있는건 어제와 똑같은 관린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도련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진다는걸 느낄 수록 조금씩 정해진 날짜가 다가온다. 그리고 마음 속의 짐이 점점 커진다.
 
지훈은 한참 동안 바닥에 놓여있는 캔버스를 바라봤다. 종교는 없지만 성경은 잘 알고 있었다. 종교화는 잘 팔리는 상품이라 꾸준히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그걸 따라 그리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종교화에서 다루는 주제들, 처형이나 부활, 구원을 보며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대입해 보기도 했다.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틀렸다. 그래서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다. 누군가는 마음속에서 자신을 처형했을지도.
 
벽에 걸린 원작에는 둥근 외모에 마음씨 좋은 중년 아저씨의 모습을 한 예수가 광야에 앉아있다.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 맨발인 채로 손 위의 작은 전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예수의 머리는 먹구름 낀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갈색조가 지배적인 화면에서 더욱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자신의 캔버스를 봤다. 같은 색을 입은 인물이 덩그러니 앉아있다. 자갈밭에 주저앉아있는 예수의 표정은 원작의 진중함을 넘어서 애잔해 보인다. 원작의 전갈은 예수를 위협하는 동물이 아니라 애정이 어린 시선을 받고 있지만, 자신이 그린 예수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붓을 들고 예수의 표정을 덧칠한다. 머릿속으로 수십번도 더 읽었던 작품해설들이 떠오른다. 원작 속 예수의 표정은 광야 생활을 통해 보잘것 없고, 잊고 지냈던 것들을 의미 있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성스러움이 담겨야 한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지훈은 손목을 털어내고 캔버스를 바라봤다. 연민에 가득 찬 예수의 표정, 여전히 그려 넣지 못한 전갈. 잠시, 지훈은 붓을 던져버렸다. 연민에 가득찬 표정은 예수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관린의 표정이다. 늘, 언젠가 그가 자신을 저렇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예수는, 관린은 그 어떤 대상도 챙겨줄 수 없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앉아 시선을 받아내는 전갈조차 될 수 없다.
 
- 박지훈씨에게 노란색은 기쁨이나 설렘인가 봐요.
 
나이프를 꺼내 노란색 물감을 크게 떴다. 언젠가 나무를 회색으로 덮어버렸던 관린처럼 캔버스를 덮으려다 결국 하지 못했다. 서쪽으로 올 수 있는 연결 통로를 건널 때 마다 누가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까 뒤돌아 보는 게 싫다. 비서가 오는 시간을 체크하고, 관린의 방문이 닫히는 순간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달리는 것도 싫다. 허겁지겁 빈 방의 문을 닫고, 누가 들어온 흔적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싫다. 무엇보다 싫은건 이렇게 있는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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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 계속 할까요?”
“모레는 곤란할 텐데요. 달이 떠요.”
 
마치 내일은 날씨가 좋을 거에요 처럼 평온한 관린의 말에 지훈은 책상을 정리하다 힐끔 관린을 봤다. 결국,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지 못한 지훈은 갑자기 관린을 그리겠다며 캔버스를 새로 꺼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는지 벌써 몇 번째 캔버스를 덮기만 하다 결국 미루고야 만다.
 
“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요?”
“저주를 풀 방법은 없어요?”
“그렇게 쉽게 풀리면 왜 저주겠어요.”
“동화책 보면 다 방법이 있잖아요.”
 
또 자기 세계로 빠져든 지훈의 옆모습을 한 번, 지훈의 뒤에 자리한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장미를 한 번 바라봤다. 수백년의 시간동안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악마는 양심과 더불어 낭만적인 면도 있었는지 해결책도 제시 해 주었다. 사랑을 만나. 네 생명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 심장이 멈추는 순간 상대가 널 진정으로 사랑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저주가 풀릴거야.
 
관린은 참 병신같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조상 중 몇 명은 성공했다. 자신의 생을 던지는 순간 흐르는 눈물로 새로운 생을 얻은 사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실패가 더 많았다. 죽어가는 순간, 대부분은 이때다 싶어 보석을 들고 도망쳤다. 탐욕이 만들어낸 저주는 또 다른 탐욕이 불러온 후회로 막을 내렸다. 관린의 엄마도 도망쳤다. 관린과 동생의 앞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은 혐오로 가득 차 있었고 겁에 질려 손을 내민 동생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이건 동화가 아니잖아요.”
 
그 말에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설정이 워낙 동화 같아서, 마지막도 동화같을 줄 알았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자신보다 관린이 더 절박하겠지.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왜요?”
 
관린의 물음에 지훈은 잠시 몇 가지 대답을 생각했다.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말은 대답이 되지 않았다. 이미 함께 있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수 있다.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 저택 안에서는 뭐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다. 이유는 딱 하나.
 
“도련님이 편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도요. 관린이 다가와서 자신을 안아준다. 아직은 머뭇거림이 담겨있는 어색한 손길, 그리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뜻함. 갑자기 치밀어오른다. 아, 난 어쩌자고 이런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을까. 정해진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도련님이 점점 좋아진다. 처음에는 호기심,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여러 가지 감정으로 덧칠해져서 사랑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사실대로 말해볼까 고민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마나 실망할까. 관린과 자신의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그만 두지도 못하겠다. 평생 이 저택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싶지만 밖에는 동생이 남아있다. 오늘 아침에도 남은 날짜를 알려주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안아주는 사람은 오늘도 따뜻하다. 이게 정말 동화 속 이야기라면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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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비서뿐만 아니라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고 해 질 녘이 돼서야 관린은 굳은 표정으로 지훈의 방에 찾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잠시 다녀와야 해요.”
 
지훈은 놀란 얼굴로 관린을 끌어안았다. 적당한 위로의 말을 생각했지만 정작 지훈도 가족이 죽었다는건 어떤 느낌일지 알지 못했다. 할배가 죽었을 때 자신이 느낀 기분과 비슷할까? 며칠동안 고생해서 완성된 그림을 넘기고 돌아왔더니 할배의 손이 굳어있었다. 내새끼가 최고라며 쓰다듬어 주던 거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 물감과 신나를 만지느라 지문도 찾아볼 수 없게 된 손이 새까맣게 변해있던 그때, 정신을 잃은 동안 지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색이 한꺼번에 섞이는 꿈을 꿨다.
 
산책하러 가요. 화요일이었음에도 나가자는 관린의 말에 지훈은 냉큼 따라나섰다. 저, 한동안 말없이 걷다 분수 앞에서 관린과 지훈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걱정할까 봐 미리 말할게요. 안 슬퍼요. 그 여자는 도망쳤어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서도 울지 않았어요. 저는 열 살이었고, 동생은 세 살이었어요. 동생이 울면서 불렀는데, 그 어린 애를 밀쳐내고 도망갔어요.”
 
지훈은 놀란 눈으로 관린을 바라봤다.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가지고 간 보석들이 신탁에 들어있고, 그 소유주가 나에요. 인사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내 것들 찾으러 가는 거에요. 걱정 마요.”
“..정말 그 뿐이에요?”
 
자신을 보는 지훈의 표정에 어색함이 들어있다. 이럴 때, 한 번씩 지훈이 저렇게 낯선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과 지훈 사이에 분명히 거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지만, 이 순간이 관린은 슬펐다. 이렇게 또 깨닫는다. 결국 지훈도 자신을 떠날 수밖에 없을 거란 걸. 한 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그림은 얼마나 그렸을까. 그게 다 되면 자신을 떠나야 하겠지? 차라리 협박할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떠나면 신고할 거라고. 아니, 다 필요 없고 원하는 건 뭐든 해 줄테니 제발 내 옆에서 함께 하자고 말해볼까. 미운 마음이 생긴다. 왜 하필 나였어요? 왜 남아있겠다고 했어요? 보내준다고 할 때, 네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사라져주지 그랬어요.
 
- 방법이 없어요?
 
말할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해주라고. 그러다 내 생을 바치는 순간 날 위해 단 한 번만 울어달라고. 그러면 저주에서 벗어나 널 위해 살겠다고.
 
- 나한테, 나한테 오지마!!!
 
동생을 밀치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죽은 아버지를, 동생과 자신을 보면 눈에 가득 찬 혐오와 그 순간 느낀 모멸감을 기억한다. 지훈은 다르지 않을까? 먼저 자신에게 다가와 줬다. 먼저 잡은 손에 힘을 줬고, 먼저 날 만져줬잖아,
 
“전 도련님이 슬퍼했으면 좋겠어요. 보석이 아까운 것보다는요.”
 
그래야, 내가 언젠가 사라지면 슬퍼해 줄 수 있을 거니까요. 차마 하지 못할 뒷얘기를 삼키는 지훈을 보며 관린은 기대가 깨진다. 자신과 지훈은 다르다. 인간인 지훈과 인간이 아닌 자신 사이에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차이가 존재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다를거다. 그 틈은 지금처럼 예상하지 못할 순간에 튀어나와 서로 할 말을 잃게 만들거다.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을 틈이 참, 멀다.
 
“난 슬프지 않아요. 하지만 예의는 다 하고 올게요.”
 
자신을 안아주는 품의 온기는 어제랑 똑같은데, 지훈은 문득 상대가 같은 사람일까 싶다. 내가 누군지 알게 돼도 이렇게 말 할 거예요?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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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린이 갔고 지훈은 몇 시간째 붓을 들고 있다가 결국 밤을 새웠다. 그러다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 못하겠다. 거의 완성된 그림을 바라봤다. 물감이 완전히 굳기까지, 후처리에 일주일. 또 얼마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정말 떠날 때가 된다.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 당장은 괜찮겠지만 나중에라도 관린이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하겠지. 나를 기억도 하기 싫어지겠지. 안되겠다. 지훈은 붓을 내려놨다. 완성된 그림을 다시 봤다. 광야에서 예수가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다. 관린도 결국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까.
 
관린이 돌아오면 모든 걸 털어놓고 용서 해 달라고 해볼까. 내가 도련님을 속였다고. 시작도 그랬고, 우리가 처음 입맞춘 날도 그랬고, 어제까지 그랬고 고민했다고. 그럼 나를 어떻게 봐줄까? 용서 해 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조금만 틀어지더라도 자신을 보며 잘못된 시작이 떠오르겠지. 한 번 시작된 의심은 끝이 없이 커지겠지. 밖에 남아있는 동생을 떠올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지훈이 하는 일을 알게 된 후부터 도망치기에 바쁘다. 새 옷을 사줘도, 용돈을 줘도 늘 의심쩍은 얼굴로 거절한다. 관린도 그러겠지.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도련님이라니.
 
전화기를 들었다. 목 빠지게 다 됐다는 자신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을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찰리. 미안해요. 저 이거 못 해요.”
 
한참 흥분했는지 붙일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붙인 다양한 새끼들로 불리고 나서 지훈이 마저 할 말을 했다.
 
“박 사장한테 계약금 그대로 준다고 해요. 그걸로 안 되면 있는 거 다 드릴게요.”
- 이새끼야,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미안해요. 진짜. 그런데 못 해요.
- 벨. 너 일이 커졌어. 지금 이미 며칠이나 지난 줄 알아? 박사장이 니 동생 데리고 갔다고!! 아니, 이거 누가 시킨 일인줄 너 알았냐? 벨. 너 그거 못 하면 나도 죽고 너도 죽는 거라고 새끼야.
 
전화기를 놓쳤다. 여전히 찰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지훈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통화를 종료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으면 편했을 텐데.
 
바닥에 놓인 캔버스 속, 지친 표정의 예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진짜 벌 받나 보다. 잠시 꿈에 취해 모든 걸 미뤄두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네. 지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생각하다 해가 질 때쯤 일어났다. 그리고 빈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언젠가 관린와 나란히 서쪽 회랑을 걷던 때가 떠올랐다.
 
관린의 방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유리관에 보관된 장미 한 송이다. 늘 관린의 책상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장미. 언젠가 그걸 만지려고 했던 자신과 소스라치게 놀라며 화를 내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끼던 거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없어진 걸 알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 많이 아끼던 거라서 두고두고 생각나고 그 때 마다 나도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안좋은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더 많은데. 지훈은 상자를 챙기고 그 자리에 들고있던 그림을 내려놨다. 도련님, 미안해요. 딱 하나만 가져갈게요.
 
조금은 다행이다. 미안해서 나쁜 일은 못 하겠고 이제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픈 거 보니 나 아직 조금은 착하구나. 아무도 없는 정원을 걸어가며 지훈은 일부러 지나간 일이 아닌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했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더라. 몇 개월은 버티려나? 그 뒤엔 어쩌지? 남의 그림 베껴 먹는 건 이제 못 하겠다. 동네 미술학원에서 알바나 해볼까. 기본기는 없어도 색 따는 건 잘 하는데.
 
그러고 보니 살면서 지금까지 생각대로 된 적이 없다. 이미 글러먹은 인생,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기회도 없네. 그래도, 가장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미움은 남겨도 배신감은 남기지 않게 돼서 다행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우리 둘 다.
 
문이 열렸다. 그 경계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더운 공기가 느껴진다. 낯선 한밤의 열기에 지훈이 몸을 떨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만월이다. 지금쯤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관린. 동화속 세상이, 그 세상 속에서 함께 했던 시간이, 그 시간 속에서 날 안아주던 온기와 멀어질 시간이다. 다 끝났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거야. 그래서 날개 달린 큐피드를 장님으로 남겨놨지.
 
관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딱 거기까지만 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 뒤도 떠오른다.
 
- 게다가, 사랑의 신은 마음의 판단력도 없어. 날개 있고 눈 없으니 무턱대고 서두르지.
 
진짜 누군지 몰라도 판단력 제로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얼굴이나 보고 떠날 수 있게 해 주지. 아니, 어쩌면 다행인가? 나한테 잔뜩 실망하고 아파하는 얼굴이라면 안 보는 게 좋을 테니까. 잘 있어요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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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관린은 문을 여는 순간 평소와 다른 공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훈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훈이 머물던 방으로 달려갔지만 텅 빈 방만 남아있었다. 결국. 관린은 생애 처음으로 착잡함을 느꼈다.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복잡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늘 지훈이 그림을 그리던 방으로 갔다. 벽에 걸려있는 원작이 담긴 캔버스는 그대로 벽에 걸려있다. 바닥에 놓여있는 그림을 보던 관린은 고개를 들어 원작을 보고, 다시 지훈의 그림을 봤다. 마지막으로 봤을때만 해도 두 그림이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특히 예수의 표정. 제목이 광야에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나? 저게 대체 무엇이길래 위작까지 할 정도인지 찾아보면서 작품 해설도 보게 됐다.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과 달리 지훈의 예수는 오히려 웃고 있다. 심지어 보조개도 패여있다. 낯선 얼굴이 아닌데. 혹시 지훈이 장난을 치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헛된 기대를 안고 관린은 방문을 닫았다.

자신의 방 문을 여는 순간, 늘 장미를 넣어둔 유리관이 사라졌다는 걸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진 작은 캔버스. 낮의 관린과 보름달 아래의 늑대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다. 두번째 만월의 밤, 늑대로 변하는 자신을 보던 눈에 담겨 있던 걱정과 다가와서 쓰다듬던 손길에 몸을 뚫는 고통이 무뎌졌다. 어쩌면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시작됐다. 그래놓고 박지훈이 갔다.  
 
돌아와서 정식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장미를, 내 생을 바칠 테니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 단 한 번만 날 위해 울어달라고. 장미도, 빌 상대도 사라졌다. 결국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숨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나보다. 지훈이 가져간 장미는 자신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라서 멀어지는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옛날 사랑을 믿고 이 사실을 털어놓은 조상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꽃을 짓이기는 모습을 보며 죽어가기도 했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 놓여있는 작은 그림. 양분된 바탕의 한 편에는 빛을 받고 있는 자신의 옆모습이, 다른 편에는 달빛을 받고 있는 회색 늑대가 각기 다른 쪽을 보고 있다. 
 
- 가장 잘 그린 그림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그리는 거에요. 그럼 보는 사람도 알아요.
- 어떻게?
- 느껴져요.
 
그게 무슨 말인줄 이제 알겠다. 처음으로 짐승이 된 자신의 모습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말하고 있다. 모두, 좋아한다고. 사라진 생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마음을 두고 갔다. 한참 그림 속의 자신을 보던 관린은 본가의 사람을 불렀다. 찾아야 한다. 


 
  
-
 
“이걸 할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벨이라면 모를까, 쉽게 찾기는 힘들겠네요.”
“벨?”
“저희끼리 부르는 호칭이에요. 이 바닥에 벨만큼 정확하고 손 빠른 애가 없죠.”
“외국인인가?”
“아뇨 별명이에요. 자기 이름 내놓을 만큼 간 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인사동의 정보통이라는 장마담을 불렀다. 마담이라는 호칭과 다르게 건장한 남자였다. 위작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고 난색을 보이며 나온 벨이라는 호칭에 관린은 본능적으로 그게 지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할에 맞게 눈치가 매우 빨랐는지 관린이 조금의 관심을 보이자 알고 있는 것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 박 사장이라고 아주 썩을 놈이 하나 있는데 그 인간이 벨 데려다 키운 장씨 묶어놓고 협박을 했잖아. 열두시간 안에 그림 하나 그려내라고. 지훈이가, 이런. 못 들은 걸로 해요. 어쨌든 그게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애가 해냈어요. 내가 거기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열두 번째 종이 치는 순간 정말 그림이 눈 앞에 있더라고. 그 뒤로 벨이라 불러요.
 
숨어있다면 찾아내면 된다.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벨이라니. 잘 어울린다. 이번에 다시 데리고 오면 두번 다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예정이다. 바깥의 인간들과 얽혀봐야 이렇게 귀찮은 일만 생기니.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길 줄 모르고 시작했다. 빼앗긴 후에는 깊어질 줄 몰랐다. 깊어지기 전에 끊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조용히 들어온 비서가 지훈의 신상기록을 내밀었다. 박지훈. 언젠가의 지훈처럼 관린도 첫 장에 있는 지훈의 사진을 보고 손가락으로 얼굴선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욕심. 결국 자신도 똑같았다. 욕심이 생겨서 애초에 지훈이 하는 걸 무시하고 넘겼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관린은 저택의 문을 열고 걷기 시작했다. 눈 앞의 세상은 더 이상 방 안에서 보던 것처럼 칙칙한 검은색이 잔뜩 뿌려진 사물들로 가득 한 곳이 아니다. 빨간색과 초록색과 노란 색이 선명하다. 강한 한여름의 햇살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살짝 벌어진 틈, 그리고 그 사이로 가장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얼굴. 조금만 기다려.
 
- 그나저나,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사장이 애들 풀어서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엄청난 일을 하나 맡아놓고 튀었대요. 동생 대신 잡아놔서 멀리는 못 가겠지만.
 
 
 
 
-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푹 자고 일어난 지훈은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창틀에 장미가 담긴 유리관을 조심스럽게 세워놨다. 응? 이틀 사이에 세 장의 잎이 떨어졌다. 물을 줘야 하나 싶어 뚜껑을 찾았지만 사면이 단단히 접합 되어 있어 빈 틈이 없다. 이리저리 흔들어봐도 열리지 않는다. 지훈은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다 이게 그냥 일반 장미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허공에 떠 있는 장미, 미세하게 빛도 난다.
 
그 순간, 또 한 장의 잎이 떨어졌고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이것도 관린이 늑대로 변하게 된 것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처음 저택에 들어갔던 순간부터 들고나오기 직전까지 매일 싱싱하던 장미가 고작 이틀에 꽃잎이 떨어지고, 붉은빛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온갖 불길한 생각을 하며 유리관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 벨, 너 지금 어디야?
“박 사장한테 제가 간다고 말 해줘요.
- 야, 지금 박 사장이 문제가 아니야. 너 그 집에서 뭐 사고치고 나왔어? 그 집 주인이 장 마담 불러서 너 찾았대.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정말 다 알게 되었구나. 내가 누군지, 왜 그 집에 들어갔는지. 모든 걸 다 알게 된 후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미워졌을까, 내게 입 맞췄던 걸 후회했을까. 동시에 작은 기대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으러 와 주지 않을까.
 
와줄까, 아니면 방 안에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방 문을 쳐다봤다. 저 문을 열고 관린이 왔으면 좋겠다. 반대로 저택의 방문을 걸어잠그고 그 안에서 자신이 남기고 간 그림을 노려보고 있을 관린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와, 나 진짜 웃긴다. 

박사장이 동생을 데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저택을 나올 생각을 했지만 동생이 큰 이유가 된 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생은 핑계다. 지훈이 정말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완성된 그림 속 예수의 표정 때문이었다. 너무나 관린의 얼굴이다. 광야를 떠돌며 신의 뜻에 따라 전갈조차 따스하게 바라보는 예수가 아닌, 저를 보며 웃었던 관린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만 같았다. 인정하자. 이젠 그림조차 제대로 못 그리게 됐는데, 내 머릿속의 관린은 이미 저렇게 늘 나를 향해 웃어주는 얼굴인데, 그게 자신을 외면할까봐, 미움 받을까 무서워 도망친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린이 오고 있다면, 아니 오지 않고 저택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가야 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직접 말해야 한다. 사실을 말 하고 용서를 빌면 한 번쯤은 나를 다시 봐 주지 않을까. 창틀에 올려진 유리관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싫어졌다고 하더라도 저 꽃은 필요할 테니까 다시 만나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지 말걸. 한 번만 다시 보고싶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에 관린이 똑같이 웃어준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사랑한다는 말도 해 볼까 한다. 그러면 어쨌든 동화속의 엔딩처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
 
“어이, 벨.”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박 사장이다. 그 옆에는 찰리가 지훈의 동생을 데리고 서 있다. 부지런한 새끼들 이럴 때만 빨라요.
 
“튈 땐 튀더라도 계산은 하고 튀어야지.”
“튀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동생은 놔줘요.”
 
박사장이 찰리를 바라봤고 찰리가 손에 힘을 풀자 남자아이가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지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시간, 지훈이 살고 있었다는 집 앞에서 관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훈을 만나는 순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훈을 데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망설임이 생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저택에서 나왔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제, 만약 지훈이 거절하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이 잡혀있다고 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같이 자랐다고 했다. 본가에 있는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충분히 강한 동생은 자신이 지켜줄 필요가 없었다. 같은 일이 생긴다면 관린은 철저히 무시했을거다. 그 전에 멍청하게 잡힐만한 애도 아니다. 하지만 지훈은. 

박지훈은 인간이다. 무시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 관린을 괴롭힌다. 여자의 죽음에 조금은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본가의 가족묘에 들이지 못하게끔 동생을 설득하느라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게 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기 생각대로 지훈이 다 정리하고 함께 저택으로 들어와 준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모든 걸 버리게 한 자신을 위해 지훈이 울어줄만큼 자신을 사랑해줄까. 어쩌면 이건 모두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지훈이 들고 간 숨이 아깝지는 않다. 태어났을 순간부터 이렇게 죽게 되어있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위의 선대도 다 이렇게 죽어갔다. 아버지는 배신을 당했고 할아버지는 죽을 날만 기다리다 결국 자신의 꽃을 꺾어버렸다. 그 둘에 비교하면 자신은 진심으로 좋아할만한 상대를 만났고 짧았지만 행복했다. 그거면 됐다. 그렇다면 딱 한 번만, 얼굴만 보고 인사만 제대로 하고 돌아서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문을 열자고 마음먹은 순간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지훈이 장미를 들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본가에서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생명이 줄어든다는걸 알면서도 그 사람들이 지훈을 살려둘까? 저택을 나서면서 비서를 통해 지훈을 살리라는 뜻을 본가에 전했지만 동생의 성격 상 온전히 무사하지는 못할게 될거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방금 전의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래도, 저래도 결국 내가 데려가는 게 맞다.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인간에게 마음을 뺏겼을까.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는 텅 빈 방에서 밀려오는 지훈의 냄새. 유리관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까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지훈을 찾으러 온 자신에게 각종 정당화를 주입시키던 관린의 표정이 저택에서 나온 이후, 처음으로 밝아졌다. 혹시, 어쩌면 자신에게 오기 위해 걷고 있지 않을까. 꽃잎이 떨어지는 걸 봤을 테고,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와 주지 않을까? 아무도 없어질 뻔한 빈 저택에서 혼자 살아가야 했을 나를 달래기 위해 나타난 것처럼. 나를 위해 먼저 남아있겠다고 해줬던 것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달려와 안겼던 것처럼, 한 번만 더.
 
그 순간, 관린의 몸이 움직였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냄새가, 그만하라는 지훈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관린에게 왔다. 몰랐으면 돌아설 수 있어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더 이상 망설일 게 없다.
 
 
 
 
-
 
“장 씨도 그렇고, 벨 너도 그렇고. 난 예술하는 새끼들이 진짜 이해가 안 가. 이건 니네들 하는 예술이 아니라 비즈니스라고.”
“알았으니까, 나 잠깐 갔다 올 데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비즈니스에는 책임이 따라요. 너네가 안 꼴린다고 비즈니스를 말아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손실이 발생해요. 손실이 발생하면? 책임을 져야지.”
“책임질게요. 진다고 했잖아요. 사장님, 나 지금 급하니까 조금만요.”
“벨, 넌 평생 그림만 그려도 이거 감당 못 해. 얼만지나 알아? 장씨 뒤질 뻔할 때 내가 병원비 댔잖아. 벨 너 잡힐 뻔 할 때 내가 구해줬잖아. 근데 이러면 내가 배신감 느끼지.”
 
마구잡이로 흥분해 있는 박 사장을 보는 지훈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힐끗 시선을 내리니 그사이 또 꽃잎이 한 송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꽃잎은 여섯 장. 그 전에 관린을 만나야 하는데.
 
“장 씨 얼굴 봐서, 딱 큰 거 세 장으로 해결하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새끼야, 네가 지금 무슨 일을 한 줄 알아? 이게 내 돈이야? 지금 니가 망친 일이 누가 시킨 일인 줄 아냐고!!”
 
박사장이 소리를 지른다. 모르지, 나야. 더 이상 대답할 힘도 없다. 해가 너무 뜨겁다. 혹시나 유리관 속의 장미가 그사이 시들지 않을까 내려다봤다. 
 
“누가 시켰는데.”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지훈의 몸이 굳어졌다. 동시에 찰리와 박사장의 눈이 커졌다. 여전히 유리관을 꼭 쥔채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낮은 목소리와 달리 여전히 미소를 띈 관린이 서 있다.

어, 어. 지훈은 관린을 보면 먼저 미안하다고 말 하려고 했다. 그 다음엔 사랑한다고 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관린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고작 삼일이 지났을 뿐인데.

“그거, 그걸 내놔!!”
 
그 순간 박사장이 지훈이 안고 있는 유리관을 가리켰다. 벨 저게 저렇게 소중히 안고 있는 걸 보니 분명히 귀한 거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도 저걸 찾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왔을 거다. 그러고 보니, 벨이 애초에 튄 것도 이상하다. 싸가지는 없어도 일은 꼬박꼬박하던 애가 배신을 때렸다, 이거야. 분명히 자신에게 받은 돈 보다 더 값진걸 찾아낸 게 분명하다. 소문만 무성한 저택에 들어갔더니 정말 소문처럼 황금으로 뒤덮인 방을 발견한 거다! 그중에서도 저거 하나 들고 나온 거 보니, 저게 진짜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지훈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박 사장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맞네. 어차피 이번 건은 망쳤다. 얼굴도 보지 못한 의뢰인은 엄청난 돈을 건네면서 틀어질 경우, 네 목숨값이 될 거라고 했다. 그림 대신 저거라도 가져다 바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 소문의 저택에서, 황금으로 뒤덮인 방에서 그림 대신 가져 온 거라면 살 수는 있을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박사장이 지훈에게 달려들었고, 그 사이 지훈을 잡아채는 관린이 더 빨랐다. 하지만,
 
쨍그랑.
 
유리관은 얄팍한 소리를 내며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두 개의 꽃잎이 더 떨어졌다. 관린은 자신도 모르게 박 사장을 집어 던져버렸다. 감히, 네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혀 축 늘어저버린 박 사장을 보며 찰리는 도망쳤다. 그 짧은 순간에 또 한장의 꽃잎이 날아가버렸다. 난장판 속에 지훈이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들었다. 마지막 한 장의 꽃잎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 채 여름의 햇살에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관린은 정말로 숨이 느려지는 걸 느끼고 주저앉고야 말았고, 그 순간에 바라본 지훈은 눈물 대신 놀란 눈으로 자신을, 꽃잎이 다 사라져가는 장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와, 결국 이렇게 됐다. 관린은 무릎에 닿는 땅바닥을 느꼈다. 이렇게 모든 게 끝나는 것일까. 한 달에 고작 하루의 고통, 얻어지는 엄청난 부. 심지어 저주를 풀 방법까지 있다는건 나름 괜찮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이게 그렇게 큰 형벌인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쯤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 계산하게 하다니. 생명이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조차 사랑하는 상대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왜 지금 울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게 하다니. 

그 때 귓가에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말한다. 죽여, 그를 죽여. 그의 목을 움켜쥐어. 그러면 너는 살 수 있어. 이게 마지막 벌이었구나.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저주의 마지막, 상대를 죽이면 자신은 살 수 있다. 양심 있고 로맨틱한 악마와의 계약이 아니었다. 간악하고 교활한 악마의 벌이다, 이건.
 
박지훈. 내가 죽는다는 걸 알면 슬퍼해 줄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집 안에 있는 모든 걸 가져도 된다고 해줄까. 그럼 기뻐할까? 너를 혼자 두게 돼서 미안하다고 전할까. 생각은 계속 이어지는데 심장은 점점 느려진다. 아, 하고싶은 말이 딱 하나 있었다.
 
“박지훈.”
“...”
“다 됐고, 보고싶었어요.”
 
나는 다 괜찮다고, 그리고 네가 정말 보고싶었다고. 그제야 자신을 향해 오는 지훈이 보인다. 울고있나? 벌써 시야가 흐려져서 잘 모르겠다. 웃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울지 말았으면. 마지막 꽃잎이 흔들림과 동시에 발 끝 부터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악마가 속삭인다. 아직 늦지 않았어. 말만 해라. 내 손으로 죽여주마. 시끄러우니까 닥치라고 하고 싶은데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젠 혀도 굳어가나보다.
 
급히 관린의 손을 잡는 순간 하얗고 곱던 손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관린의 얼굴이 늑대의 것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놀랄 틈도 없었다. 그저 관린을 끌어안았다. 몸이 변하는 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라고, 끌어안은 품에 힘을 줘서 더 이상 커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는 혼자 있기 싫다.  
 
“눈 떠 봐요!”
 
지훈이 소리 지른다. 눈 좀 떠봐요. 정신 차려요. 병원, 병원 가요. 관린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점점 늑대로 변해가는 몸이 딱딱하다. 제발요, 눈 좀 떠요. 이젠 완전한 늑대가 된 몸을 안고 지훈이 운다. 마지막 남은 힘을 겨우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아직은, 제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기를.
 
“울지 마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더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완전히 눈을 감아버린 늑대의 몸이 식었다. 제발요. 지훈이 하염없이 되뇐다. 눈 좀 떠요. 내가 잘못했어요. 애초에 가는 게 아니었어. 그랬다면 관린은 아름다운 저택 안에서 처음 봤던 도련님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고있을 텐데. 비록 혼자 있어야 했겠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다. 자신의 욕심이 관린을 이렇게 만들었다. 욕심 때문에 덜컥 박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옆에 있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나가라고 했을 때 남아있겠다고 했다. 조금 더 자신을 따뜻하게 봐줬으면 해서, 조금 더 그 옆에 머물고 싶어서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시간을 욕심냈다.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채, 관린의 생명일지도 모르는 꽃을 들고 도망쳤다. 그 조차도 조금 더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욕심 때문에.
 
늑대를 끌어안고 울던 지훈의 눈에 마지막 꽃잎이 보였다. 순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잡으려고 하는데 눈앞이 흐려 잡히지 않는다. 겨우 얼굴을 닦아내고 눈물 범벅이 된 손으로 꽃대를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꽃잎이 떨어졌다. 바람이 또 분다. 어디론가 날아갈 뻔한 꽃잎을 잡았다. 축축한 손에 꽃잎이 잡히는 순간 늑대가 빛으로 휩싸였고, 지훈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빛을 바라봤다. 빛무리가 사라지자 남아있는 건 사람의 모습을 한 관린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어렸을 때 몰래 읽었던 동화에서처럼 관린이 살아나길. 마음 속으로 되뇌는 순간 양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밑을 보니 손에 쥐고있는 꽃대에서 아까 관린의 몸을 둘러쌓던 빛이 나기 시작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점점 뜨거워진다. 손바닥을 펼치는 순간 빛이 사라질까 겁나 꾹 참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고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순간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꽃대에 새롭게 꽃망울이 생겨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맞았다. 작지만 분명히 꽃망울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훈이 관린을 바라봤다. 여전히 감고 있는 눈, 새하얀 얼굴. 하지만 지훈은 관린을 흔들기 시작했다. 눈 떠요, 도련님. 들려요? 점점 흔드는 힘이 세졌는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지훈이 몸을 숙여 심장 부근에 귀를 가져다 댔다. 

미세하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작지만 끊기지 않고 울리는 박동이 느껴진다.   
 

 

-
 
어떻게 됐냐고? 여기까지 들었는데 모르겠어? 한 김에 마저 얘기 해 줄게. 마지막 꽃잎이 벨의 눈물을 삼키고 다시 살아나는 순간 야수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어. 매년 8월, 더 이상 늑대가 아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 그 달에 붉은 장미 넝쿨이 둘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답게 저택을 감쌌지. 

지금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언젠가는 시간속에서 흘러온 아주 오래 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둘의 사랑이 너무 완벽해서 다른 걸 더할수도, 뺄 수도 없을 만큼 진실한 이야기가 될거야. 예기치 못한 시작,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났지. 누군가 돌연 마음의 벽을 허문 순간 믿을 수 없는 얘기가 펼쳐졌어. 둘 다 조금은 겁이 났겠지? 누구도 준비하지 못했던 시작이라서. 

사랑은 언제나 같은 느낌으로, 언제나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사랑은 늘 여전하면서도 언제나 확실하단다. 적어도 그 둘에게만큼은. 노래 속에 녹아온 선율 같고, 쓰면서도 달콤하고 때로는 신비로운게 사랑이래. 벨이 그랬어.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고, 과거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게 사랑이라고. 야수도 그랬지. 언제나처럼,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햇살처럼 확실한게 사랑이라고. 지금까지, 미녀와 야수의 사랑이야기였어.     
 

저기, 저 저택이 보이니? 야수가 살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봤지? 야수라고 해도 진짜 짐승은 아닐 거야. 아니, 실은 정말 야수인지 누구도 몰라. 그냥 소문에 의하면 그렇대. 넓은 대지에 으리으리한 저택이 지어지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과연 저택의 주인 누굴지 궁금해했지. 하지만 저택이 완성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14년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저택의 문이 열렸어. 아직은 앳된 소년의 뒤를 단 한 명의 집사가 따르고 있었고 다시 문이 닫혔어. 사람들은 마음씨 좋은 주인이 저택의 문을 열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를 기대하며 그 날을 기다렸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택의 문이 활짝 열린 적은 없었어. 그리고 소문이 시작됐단다. 평생을 세어도 다 못 샐 만큼의 황금과 보석이 가득 차 있다든지, 반신불수가 된 어느 나라 왕족의 사생아가 갇혀있다든지, 혹은 악마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저주를 받은 괴물이 살고 있다고.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며 언젠가 저택 안의 보석을 훔치기 위해 몰래 들어간 도둑이 정신이 나간 채로 마을에서 발견됐어. 벌벌 떨며 남자가 말했지. 황금으로 벽이 칠해졌고, 엄청난 보석이 가득 찬 방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안에는 백색 털의 야수가 장미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어. 소문이 진짜였다고. 하지만 실체가 없는 말은 이내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 그렇게 누구도 저택의 안에 누가 있는지, 황금으로 칠해진 방이 진짜 존재하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십 년인가? 그래, 올해로 십 년의 시간이 흘렀단다.

 

아, 이건 사랑 이야기야. 긴장 풀어.

 

 

 

 

-

 

 

 

 

“하루 두 시간은 책을 읽으십니다. 도련님이 원하시는 책을 적어주시면 서고에서 찾아서 가져다드리세요.”

“네.”

“저녁 산책 시간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세요. 적당한 거리는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를 말합니다.”

“네.”

 

깐깐해 보이는 집사는 그 밖에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세 시간 동안 각종 주의사항을 읊은 후에야 서명하라며 만년필을 내밀었다. 계약서를 받아 든 집사는 안경 끝을 손가락으로 추켜올리고 한 번 더 살펴보더니 드디어 지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도련님은 굉장히 친절하고, 온화하신 분입니다. 잘 왔다고 생각하실 거에요.”

“네.”

“도련님이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화를 내신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에게 함부로 하신 적도 없답니다. 지훈 씨도 분명히 잘 지내실 거에요.”

 

처음으로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띤다.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늙은 집사의 얼굴은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지훈은 이 저택에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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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시작이라는 생각에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지훈은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 깊숙한 곳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Quarantaian, 알렉산더 칼더, 스탠리 스펜서의 광야에서의 그리스도까지. 앞에 세 장만 봐도 벌써 얼마야, 이게. 옥션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그림들의 나열에 지훈은 순간 몸을 떨었다.

 

그림의 추정가액이 적혀있는 몇 장을 대충 훑어보다가 다시 첫 장을 펼쳤다. 집주인인 도련님. 마리 로랑생의 자화상 같은 얼굴이다. 거친 듯하면서도 쌍꺼풀이 짙은 눈과 도톰한 입술이 유독 도드라진다. 지훈은 손가락 끝으로 사진 속의 유려한 얼굴선을 따라 그렸다.

 

창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정원의 풍경이다. 솟아오르는 분수에 부서져 떨어지는 햇살. 지훈은 사전조사 중 알게 된 저택의 가격을 떠올렸다. 포브스에서 선정한 가장 비싼 집인 트랑퀼리티. 그리고 가격을 매길 수 없지만 매물로 나온다면 그를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이가문 소유의 이곳, 플레우어 데 리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지어진 이 저택은 무려 1억 2500백만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계세요? 노크소리와 함께 들리는 낮은 목소리. 이 저택의 소유자. 별별 소문에 휩싸인 주인공인 도련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미 유명했다. 누구는 사고 때문이라고 했고 누구는 저택 안에 쌓아놓은 보석에 정신이 팔려있다고 했다. 혹은 엄청난 부를 쌓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저주로 인해 햇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조금은 허무맹랑한 소문도 있었지만 정답은 없었다. 정보팔이 중 으뜸인 강마담도 어떤 이유로 그림같이 생긴 도련님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갇혀만 있는지 알지 못했다.

 

뭐, 다 상관없다. 지금부터 3개월간 지훈은 그림만 그리면 된다. 방 안 구석에 화구통을 정리하면서 습관처럼 손목을 꺽었다. 3개월 뒤 자신의 모작과 원작을 바꾼 후 떠나면 된다. 원작은 지하경매시장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모작은 이 곳에. 생각을 멈추고 지훈은 방 문을 열었다.

 

“어제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라이관린입니다.”

“박지훈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지훈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어색하게 앉자 직접 커피가 담긴 컵을 가져다줬다.

 

“환영하는 의미로 제가 준비했어요. 집사가 이것저것 깐깐하게 말했겠지만 난 그런 거 별로 안 따져요. 계시는 동안 편하게 있어요.”

 

처음으로 제대로 본 얼굴에 지훈은 속으로 감탄했다. 어제 본 사진 속의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다. 관린도 맞은편에서 조심스럽게 웃는 얼굴을 관찰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을 들여야 한다는 상황에 화를 내기도 했으나 도련님을 홀로 둘 수 없다는 집사의 눈물과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구인조건은 첫째도 입이 무거울 것, 둘째도 입이 무거울 것, 셋째도 입이 무거울 것.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다는 집사의 말에 관린은 대충 대답했다. 아무나 조용하고 뒤탈 없을 애로 뽑아. 지켜보다가 아니면 말자고 생각했다. 본가에서 자신을 위해 와줄 사람은 차고 넘친다. 집사의 말을 들은 건 관린 입장에서는 어쩌면 일종의 변덕이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보는 일반인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동안 너무 다른 사람을 안 만나기도 했고. 정 안되면, 뭐. 죽여버리게는 생략했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벌써 보름. 집사의 말대로 도련님은 친절하고 온화했다. 오전에는 서재에서 업무를, 간단한 점심 이후 오후에는 두 시간의 독서. 일주일에 세 번 저녁에는 산책하는 규칙적인 생활의 반복이었다.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는 경제학을,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사회학과 물리학에 관련된 책을 봤다. 원하는 책을 찾아서 건넬때 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이 방문했고 늦은 시간까지 서재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 사이 지훈은 저택의 구조와 그림의 위치를 확인했다. 몰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도 찾아냈다. 홀에 놓여있는 도자기와 고가구들은 옥션과 소더비에서도 볼 수 있던 눈에 익은 것들이라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박물관인가 싶었다. 도련님과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럼 지훈씨는 학생이었어요? 전공은요?”

“네. 미술 전공했어요. 서양화요”

“좋네요.”

 

뭐, 엄밀히 말하면 학생은 아니지만, 서양화는 맞으니까. 가짜로 만들어진 이력,사항을 상기하며 대답하자 관린이 부드럽게 웃는다.

 

“학교 얘기 해줘요.”

“뭐, 다 똑같죠.”

“뭐가 똑같아요?”

“도련님 다녔던 학교나 제가 다니는 학교나 그게 그거죠. 수업 듣고, 밤새 그림 그리고. 그러다 배고프면 나가서 놀고. 다 똑같아요. 도련님은 학교 다닐 때 뭐 했는데요?”

“난 안 다녔는데.”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려고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예상외의 답이 나왔다.

 

“17살 이후로 이 곳에서 나간 적이 없어요. 그래서 얘기 듣는거 좋아요. ”

“왜요?”

“...”

“아, 죄송. 어...“

“특히 그림 그리는 사람은 주변에 처음이라 더 새롭네요.”

 

그간 본 도련님은 너무나 정상적이라 자신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 상대가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걸 깜빡했다. 지훈은 하얗게 된 머릿속에서 겨우 이 상황을 수습할만한 걸 떠올렸다.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지훈씨가?”

“어, 엄청 잘 하지는 못해도 애들 몇 명 가르쳐 봤는데, 싫으시면…”

 

온몸으로 당황했음을 표현하며 큰 눈을 여기저기 굴리다가 겨우 내뱉는 말에 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순간 망했구나 싶었다. 이러면 나중에 내가 1순위로 걸리잖아. 그림 그린다는 말은 왜 해서. 자신은 위작은 해도 말로 사기 치면 안 될 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

 

도련님과 더 가까워졌다. 며칠 뒤 평소와 달리 오전부터 비서가 방문했고 오후가 되자 지훈은 서재에서 찾아와야 할 책 목록을 건네는 관린 대신 스케치북과 연필을 쥐고 있는 관린을 보게 됐다. 찰리가 키워보겠다고 데려왔던 애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선 긋기와 곡선 그리기를 시켰고 관린은 처음에는 재미있다며 따라 하다가 20분이 지나자 몸을 비틀더니 이내 쇼핑백을 뒤져 물감을 꺼냈다.

 

“이건 안 해요?”

 

갑자기 지훈이 웃는다. 자기가 처음 그림을 배웠을 때가 생각난다. 선 긋기부터 하라는 할배 말에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다.

 

“이제 해요.”

 

붓에 물감을 묻히고 어설픈 밑그림을 채색하며 관린은 이게 훨씬 더 재미있는데 선 긋기는 왜 하냐며 물었다.

 

“기초 연습인데, 솔직히 저도 오래 안 했어요. 재미없잖아요.”

“그래놓고 나는 오래 시키려고 하고.”

 

투덜거림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물감을 섞던 지훈이 관린을 바라봤다. 하얀 볼, 살짝 튀어나온 입. 커다란 손으로 잡고 있는 수채화용 붓까지. 왜 그런 소문이 생겼을까? 이렇게 다정한 도련님인데. 그 사이, 나무를 다 칠한 관린이 스케치북을 내민다.

 

“어때요?”

 

관린이 색을 입힌 나무를 보고, 관린이 보고 그렸을 창문 밖의 커다란 나무들을 다시 봤다. 지훈의 눈에 한여름의 빛을 받은 메타세쿼이아들은 찬란한 초록빛을 보란 듯이 발산하고 있었지만 관린이 쓴 녹색은 어둡고 침잠하는 녹색들이었다.

 

“도련님, 혹시…”

“네?”

 

직접 묻지 못하고 지훈은 제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가리키면서 이게 무슨 색으로 보이냐고 물었다.

 

“파란색이네요.”

“그럼 이건요?”

 

커피가 담겨있는 머그잔을 가르키자 빨간색이라며 정답을 말한다. 그럼 색맹도, 적록색맹도 아닌데.

 

“다른 걸 그려보는 건 어때요?”

“다른 거, 뭘 그릴까요.”

“도련님이 좋아하는 거요.”

 

좋아하는 거라고 말하는 지훈의 얼굴에 관린이 속으로 웃었다. 좋아하는 거라. 지금 자신이 녹색 나무를 시커멓게 칠해버린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자신의 눈에 비추는 세상은 이렇다. 뭘 보더라도 대상 본연의 색보다 짙은 명암으로 가득 차 있다. 뭘 그려도 이럴 텐데.

 

“전 그림에는 소질이 없나 봐요. 못 그리네.”

“아니에요! 아직 그리고 싶은 대상을 찾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가장 잘 그린 그림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그리는거에요. 그럼 보는 사람도 알아요.”

“어떻게요?”

“어, 느껴져요. 전 그랬어요.”

 

눈앞의 순진한 인간을 본다. 좋아하는 대상, 낯선 단어. 관린은 갑자기 친절한 도련님의 가면을 벗고서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것 따위 없어요.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봐요. 뭐든 시커멓고 우중충하게 보이게 될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뭐, 좋아한다는 게 꼭 대상이 사람이 될 필요는 없고요, 동물은 안 좋아하세요? 라고 쓸데없이 중얼거리는 인간을 보니 당분간은 상냥하고 친절한, 모종의 사유로 인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도련님으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글쎄요. 좋아하는 건 차차 찾아볼게요. 그런데 아마 밖에 있는 건 다 이렇게 보일 거예요.”

 

순간 지훈은 자신이 칠해놓은 나무를 보는 관린의 눈이 새삼 쓸쓸하다고 느꼈다.

 

“바깥은 좋아요?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이러나 보다. 다 흐릿해서. 색으로 따지면 이렇게.”

 

동시에 관린이 회색 물감을 짜서 나무를 덮어 버렸다. 회색 필름으로 한 겹 덮은 것 같은 스케치북을 보는 지훈의 표정이 더 당황스러움으로 물든다. 관린은 집사의 말을 듣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입이 무거울 저 인간의 표정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다.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여전히, 거슬리면 보내버릴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

 

지훈이 보이지 않았다. 방에도, 주방에도, 정원에도 없다. 이 저택에서 지훈이 흥미를 느낄만한 공간이 어디가 있을까? 관린은 지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해. 분명히 밝은 표정이지만 그늘이 있고 얼핏보면 단정해 보이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운 행동들. 뭔가 있다.

 

지훈의 이력서는 관린과 집사가 찾던 조건에 너무나도 부합했다. 집사는 이 늙은이 가는 길, 편히 가라고 그런가보다며 또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숨길 수 없는 짐승의 촉이 뭔가, 분명히 있다고 알려준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누군지 숨기고 몰래 들어올 간 큰 인간이라면 뭘 바랄까. 반짝이는 건 언제나 진실의 눈을 멀게 하고,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지. 얼굴도 모르는 조상이 떠오른다. 황금에 눈이 멀어 악마와 계약을 한 멍청한 존재. 대대손손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황금의 대가는 내리 물림 되는 저주. 본가의 장남은 열일곱의 생일이 되는 날 늑대로 변한다.

 

한 달에 한 번. 같은 피를 물려받은 그들 중 몇은 날짜를 잘 셈해서 인간들 사이에 섞였으며 누군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 날뛰었다. 관린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방임을 택했다. 날짜를 셈하는 번거로움, 혹시나 하는 불안을 안고 섞일 만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쳐 날뛰거나 본가에서 은둔자로 살아가기에는 아쉬웠다. 아버지처럼 가문의 사업을 이어 받았지만 책임소재는 최소로 조절했다. 계열사가 딱이다. 할아버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나 그 집은 본가도, 지도상에서 찾기도 힘든 곳이 아니라 누구나 알만한 저택을 택했다.

 

관린은 저택의 서쪽 회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간의 눈이 멀만한 모든 탐욕의 집합소. 그리고 그 곳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지훈을 떠올렸다. 두근거린다. 욕심에 눈이 먼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문을 열었지만 그 안에 지훈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불쾌한 빛을 내뿜는 보석들이 보관함 안을 지키고 있을 뿐. 뭐지? 잠시 갸우뚱하던 관린은 이내 밝아진 표정으로 다음 방으로 향한다. 그림 그리는 애라고 했으니.

 

하지만 그림을 모아둔 방에도 지훈이 없다. 아닌가? 관린은 평소 관심을 두지 않던 서편에 온 김에 남은 방들을 둘러볼까 한다. 반짝거리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관린은 잔뜩 놀란 지훈의 얼굴이 궁금했다. 뭐라고 변명할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옆 방에서도 지훈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정말 아닌가? 다시 돌아가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진다. 네 번째 방. 아직 채울 것들을 찾지 못해 비어있는 방에 걸려있는 단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광야에서의 그리스도. 관린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림 그리는 애라더니, 제대로 알아봤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지금 눈앞에서 뒤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물감을 섞고 색을 칠하고 있는 박지훈. 보아하니 한 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관린은 지훈의 이력서를 떠올렸다. 부를 때 반응을 보니 이름은 진짜고 학교? 가짜다. 나이? 가짜다. 그렇다면 지훈을 소개 한 사람도 한 통속이겠네. 이제 정체를 알겠다. 위작하는 애구나. 집사도 아주 둔해졌어. 뭐,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기면 처리할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관린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내일은 방 밖에서 나오지 말아달라고 하고, 그 이유를 뭐라 말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하는 걸 보아하니 이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좋아하며 종일 그림만 그릴 태세라 오후, 평소처럼 책 목록을 받으러 온 지훈에게 평소보다 더욱 상냥하게 부탁했다.

 

“오늘은 비서가 늦게까지 머물 예정이에요. 일이 복잡해져서 많이 시끄러울 수 있으니 방 안에 있어 줄래요?”

 

내색은 안 하지만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어온다.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네?”

“심부름 막 시키셔도 되는데.”

 

냉큼 좋다고 방으로 들어가 그림이나 베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지훈은 쭈뼛거리며 방 안을 빙빙 돌았다. 아까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던 모습과 지금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처럼 티 없는 얼굴을 보자 관린은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 서쪽에 가면 그림이 많아요. 가문에서 수집한 것들인데, 물론 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집사가 사람 불러서 정리할 정도인거 보면 유명한 작품들도 있을 거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지훈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고 그걸 보는 관린의 표정은 짓궂어진다.

 

“전혀 관심이 없어서 이제야 생각났어요. 구경하세요. 아,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따라 그리는 것도 공부가 된다면서요? 그러셔도 돼요.”

 

아예 대놓고 말하자 난감해지는 얼굴을 본 관린이 아예 지훈을 떠민다. 가보세요. 밤 되면 밖에 나오지 마시구요.

 

하지만 쨍그랑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이 문 앞으로 달려가 귀를 대고 몸을 낮췄다. 또 한 번 둔탁한 소음이 들린다. 놀라서 문고리를 잡는데 방 안에 있어 달라는 관린의 부탁이 맴돈다. 나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지훈은 문고리를 돌렸다. 일이 복잡하다더니 싸움이 났나? 그 비서, 좀 험악해 보이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용주랑 저렇게 싸울 수가 있나? 진짜 싸움이면 큰일이다. 예쁘게만 생긴 도련님은 집 밖으로 안 나가서 약해빠졌을 거다. 그 비서 양반이랑 비교가 안 된다. 나도 뭐 잘 싸우지 않지만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겠지.

 

역시나 소음이 들려오는 곳은 관린의 서재였다. 잠시 앞에서 초조하게 방 안의 소리를 몰래 들어보려던 지훈이 다시 들려오는 유리 깨지는 소리에 재빨리 문을 열었다.

 

“도련님, 괜찮!!”

 

무슨 일이냐는 물음은 완성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건 비서양반에게 당하고 있는 연약한 도련님이 아니라,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방 안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은회색 털로 뒤덮인 늑대, 아니 늑대인간.

 

 

 

 

-

 

방으로 겨우 돌아온 지훈은 문을 잠갔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늑대인간이라니. 지금이 어떤 시대야. 과학의 발달로 비파괴 검사네, 탄소 14 동위원소 측정이네 하는 바람에 위작도 갈수록 힘들어져서, 나 같은 사람들 밥벌이 걱정해야 하는 시대인데 분명히 눈앞에 있던 건 늑대의 형상을 한 야수였다. 확장된 동공과 뾰족한 귀, 늘 단정하게 갖춰 입던 옷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훈은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보름달. 늑대인간, 맞네. 지금까지 내가, 늑대인간이랑 책 보고 늑대인간이랑 밥 먹고 늑대인간이랑 얘기하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망가자. 돈 좋지. 근데 살아야지. 왜 그냥 나왔냐고 물어보면 뭐라 하지? 아니, 일단 자고 생각하자는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뭔가가 깨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음날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관린이 지훈의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바로 들렸을 목소리 대신 적막이다. 겁 먹었나 보네. 그냥 손잡이가 돌아가다 잠금쇠에 걸려 멈춘다.

 

“박지훈씨.”

 

여전히 대답은 없지만 관린은 문 반대쪽에서 지훈이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 문 따요? 이거 그냥 부술 수 있는데.”

 

흠칫거리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요. 시끄러울 수 있으니까 방 안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이젠 딸꾹질까지 하나 보다. 인간에게 들켰으니 귀찮아지겠다는 생각보다 방 안에서 초조해할 지훈의 표정이 더 보고 싶다.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관린의 예상대로 잔뜩 울상이 된 표정과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심부름 막 시키셔도 된다며 자신을 힐끔 올려다보던 하루 전과 너무 다른 눈빛. 그 안에 있는 게 두려움이라는 걸 알게 되자 처음에 놀리고 싶다는 생각과 다르게 이상한 짜증이 밀려왔다. 인간들이 뭐, 그렇지.

 

“나갈 거예요?”

“네?”

“어제 봤잖아요. 그만둘 거냐고요.”

“...저 보내시려고요?”

“싫다는 사람 안 잡아요.”

“안 죽여요?”

 

자신을 무사히 내보내 줄거냐는 말에 관린이 이내 웃었다. 그리고 지훈이 눈치채지 못하게 방 안을 둘러봤다. 그 새 정리된 방,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으면서.

 

“내가 지훈씨를 왜 죽여요.”

“도련님 정체를 들켰잖아요.”

 

지훈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민다. 늑대인간의 습성? 굵은 글씨로 쓰여있는 연쇄살인이라는 단어에 관린이 눈을 찌푸린다.

 

“난 사람 안 죽여요.”

 

거짓말! 지훈의 표정이 말해준다. 물론 거짓말. 관린도 속으로만 진실을 말한다.

 

“박지훈씨, 본가에서 사람 보내기 전까지 집사 대리로 채용됐죠? 그리고 일 잘 했죠? 어제는 예기치 않게 발생한 인플레이션 정도로 쳐요.”

 

인플 뭐? 어쨌든 지금 관린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말하고 있다. 지훈은 눈앞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련님, 아니 이제 도련님이라 해도 되나 싶은 대상을 바라봤다. 당연히 떠나는 게 맞는데, 나갈 수 있다고 할 때 재빨리 떠나는 게 맞다. 밤새 어떻게 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생각만 하다 겨우 잠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린의 말. 17살 이후로 밖에 나가 본 적 없어요.

 

“도련님 몇 살이에요?”

“네?”

“지금 몇 살이에요? 밖에 안 나간 지 얼마나 됐어요?”

“글쎄, 한 10년 됐나?”

 

흘려들었던 소문이 떠오른다. 아직은 앳된 소년과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는 한 명의 집사. 앳된 소년은 지금 눈앞의 도련님이고, 집사는 자신에게 도련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설명했던 그 할아버지였겠지. 10년 동안 밖에 나가지 못 하고 이 넓은 저택에서 집사 아저씨랑 둘이만 살았겠구나. 또 떠오른다. 그래서, 얘기 듣는 거 좋아해요. 밖은 즐거워요? 난 잘 모르겠다며 자신을 바라보던 도련님의 눈빛과 온화한 미소.

 

“집사 아저씨는 알아요? 도련님 그, 그런 거.”

 

차마 늑대인간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런 거라고 자신의 상황을 돌려 말하는 지훈을 보는 관린이 애매하게 얼굴을 찌푸린다. 알지, 당연히. 본가 사람이니까. 지금 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집사도 멀쩡했으니까 자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관린은 궁금했다. 자신이 변한 순간 도망가더라도 잡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남아 있더니, 가도 된다고 했음에도 이상한 질문만 한다.

 

“알죠.”

 

전직 집사가 비밀을 알면서도 은퇴할 때까지 무사히 있었고, 자신에게 도련님이 상냥하고 온화한 존재라고 분명히 말했다. 저택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순간들이 관린 버전의 편집본이 돼서 스친다. 책 목록을 전해주면서 친절하게 웃던 도련님, 밤새, 몰래 그림을 베끼다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늦잠을 잤을 때도 허겁지겁 식당으로 내려간 자신에게 많이 피곤하냐며 커피를 내려주던 도련님. 그림은 처음이라며 물감을 만지작거리던 모습, 밖에서 가져온 게임기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한 번만 해봐도 되냐고 묻던 얼굴. 내가 가면 또 다른 사람이 올 때 까지 이 넓은 저택 안에서 혼자 책을 보고,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산책을 하겠지?

 

“자주 그래요?”

“뭐가요?”

“어제처럼요. 아니죠? 한 달에 한 번만 그러는 거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또 이상한 것만 물어본다.

 

“검색해봤잖아요. 한 달에 한 번, 보름달 뜰 때 그래요. 그리고 어제 봐서 알겠지만 이 그림처럼 이상하게 변하지도 않아요.”

 

관린은 여전히 들고 있는 지훈의 핸드폰에서 스크롤을 내리더니 시커먼 늑대인간의 형상을 내밀었다.

 

“어쨌든, 계약은 내 쪽에서 파기하는 서로 하고 급여는 비서에게 말할게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 간만에 재미있었는데. 어쨌든 관린은 지훈을 아무 대가 없이 보내주기로 했다. 어설프게 가르쳐준 그림 수업료라고 치자. 본가에 연락해서 이번엔 확실한 사람을 구해야겠다. 새로 뽑는 거 말고, 그냥 본가에서 한 명 보내달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저 안 가요.”

“네?”

“안 가요. 대신 앞으로 미리 말 해주세요. 진짜 놀랐어요.”

 

혹시 비밀유지를 명목으로 다른 걸 요구하면 어쩌나. 죽여버리는 게 빠르지만 괜히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들려오는 예상 밖의 목소리에 관린이 오히려 놀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 앞의 인간은 여전히 인터넷 검색 중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실소가 나왔다. 관린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쫓아내거나, 확실한 입막음을 원하면 그냥 묻어버리거나. 너무도 간단한 해결방법이 있는데 왜 이걸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상이 시작됐다. 늑대로 변한 모습까지 봤으니 더 조심스러워질 거라는 관린의 예상과 달리 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이전보다 더 발랄하게 저택 안을 누볐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더 스스럼이 없어졌다. 남아있겠다고 한 다음 날, 달력을 가져와 날짜를 체크했다. 다음 보름 날짜를 확인하더니 이날은 방 안에만 있겠다며 동그라미를 몇 겹으로 그렸다.

 

어렵다. 혹시 눈치챌까 봐 신경 썼던 것 보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난 후가 더 어렵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나. 본모습을 본 사람들은 열 손가락 정도는 된다. 저주는 저주지만 관린은 특별히 조심하지도, 자신의 모습에 흉측함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도 조상은 양심이 좀 있는 악마와 계약을 했는지 흔히 알려진 늑대인간들처럼 뻣뻣한 검은 털에 노란 눈, 혹은 갈고리처럼 길어지는 손가락도 없다. 그냥 은회색 털로 뒤덮인 늑대가 될 뿐이다. 이족보행이 가능하지만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사족보행을 한다. 보름달이 뜨는 순간 짐승의 털을 뒤집어쓰고 고통스러운 새벽이 지나면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지훈이 봤을 때는 하필 막 몸이 커진 후라 제어가 좀 안 됐을 뿐 자기통제도 나름 잘 하는 축에 속한다. 기록으로 남아있던 다른 조상들과 비교했을 때 이 정도면 엘리트다.

 

겁 없는 인간은 점점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왜 그렇게 된 예요? 늑대가 되어있을 때 일은 다 기억해요? 질문 다음엔 부탁이었다. 집어던지는 거 안 하면 안 돼요? 저 진짜 놀랐거든요. 막 눈앞에 있는 거 부수고 싶어요? 관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지훈의 물음에 하나씩 대답해 줬다. 열 일곱 생일부터요. 가문의 저주예요. 기억 하죠. 그러니까 다음날 박지훈씨 찾아갔잖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듣는 지훈에게 내친김에 그 저주가 무엇인지, 왜 자신이 그 저주를 받게 된 것인지도 말했다. 관린의 얘기가 끝나자 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욕을 내뱉었다. 그, 씨발놈이네요? 그 말에 관린은 몸을 접어가며 웃었다.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못 나가는 거예요?”

“안 나가는 거예요.”

“날짜만 잘 맞추면 괜찮지 않아요? 솔직히 저 진짜 몰랐었는데. 보기 전까지.”

“안 나가요.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보다 이게 편해요.”

“그래도 십 년이나 집 안에만 있으면… 저도 예전에 한 3개월 밖에 못 나가고 살았던 적이 있는데 답답해 죽는 줄 알았거든요.”

“왜 못 나갔어요?”

 

헙. 지훈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려다가 더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 그림 그려야 해서요. 그림 그렸지. 석계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삼 개월을 작업실에서만 살았다. 심지어 동양화였다. 자신을 가르쳤던 할배의 부탁에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일로 이 바닥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고난의 행군이었다.

 

엄청난 거 하나 베꼈나 보군. 그걸 보던 관린도 생각했다. 문득 박지훈이 궁금해진다. 몇 번 지훈이 잠든 틈을 타 작업 중인 빈방을 찾았다. 완성해 나란히 벽에 걸어놓으면 뭐가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교한 그림이 1/3 이상 완성되어 있었다.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손도 빠르고 실력도 좋다. 그런 박지훈은 왜 위작을 하나?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요?”

“음… 기억은 안 나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심심하면 낙서 같은 거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뭐.”

“정식으로 시작 한 건?”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나중에 옆집 할아버지한테 색 쓰는 법이나 캔버스 보는 법 같은건 배웠는데 금방 돌아가셨어요.”

 

옆집 할아버지가 선생이나 보네. 관린의 얘기와 자신이 생각하는 걸 맞춰가면서 도련님이 누구인지 새롭게 정의하는 지훈처럼 관린도 지훈이 하는 말을 듣고 지훈을 알아가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조금 더 궁금해지고, 조금 더 지훈을 알고 싶어하는 자신을 알아챘을 때 관린은 서쪽 방으로 향했다. 캄캄한 밤, 텅 빈 방 안에서 자신이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박지훈이 여전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언젠가처럼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붓질을 하다 잠이 들어있다. 깨워서 편히 자라고 하고 싶다. 저게 가지고 싶다면 말하지. 줄 수 있는데. 불편하게 잠든 지훈을 깨우려던 관린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잘 잤어요?”

“네. 잘 주무셨어요?”

 

아무리 봐도 피곤한 얼굴인데 애써 웃으며 아침을 준비하는 지훈을 보니 이상하게 심사가 뒤틀린다.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거 보니 불편했나 보다. 왜 숨기는 걸까? 그깟 그림,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다. 관린에게 있어 값진 보석과 예술품은 별 가치가 없다. 보면 예쁘니까 가지고 있을 뿐, 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대체시킬 수 있는 물건들에 불과하다. 왜 그걸 위해 박지훈은 정체를 숨기고 이 곳에 들어와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자신과 있는 것일까.

 

관린은 완전히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17살 이전의 자신도 저런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오히려 자신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좋았다.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지훈을 보내주기로 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늘 침울한 표정이거나 감정 없이 움직이는 본가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도 표정이 변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몰래 그림을 베끼면서도 집중하는 모습이 좋아서. 그런데,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데 그걸 모르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고작 그림 때문에.

 

“서쪽 방에 가봤어요?”

“네? 네.”

“어때요?”

 

뭐가요? 묻는 지훈의 표정이 살짝 불편해졌다. 그걸 보니 또 재미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어요?”

 

관린은 이번만큼은 지훈이 솔직하게 말 해줬으면 했다. 광야의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요. 그걸 가지고 싶어요. 그렇다면 관린은 만족스럽게 그림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더 자신을 속여야 할 필요가 없는 지훈을 보고 싶었다.

 

“어, 다 좋던데요?”

“...그래요.”

 

하지만 아쉽게도 지훈이 기회를 저버렸다. 잘 구워진 빵이 담긴 접시를 내밀면서 애써 자신의 시선을 피한다. 관린은 조금 못된 생각이 들었다. 언제쯤 지훈은 솔직해질까? 난 이미 다 얘기 했는데. 왜 계속 숨기려는거지? 그렇다면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인간들은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 솔직해진다. 자신의 모든 걸 내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관린은 지훈의 호감을 사기로 했다.

 

 

 

 

-

 

존스는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만으로도 그 느낌을 주는 상대방을 좋아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관린은 밑줄 친 구절을 몇 번 다시 읽었다. 존스는 친절하게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전략도 제시했다. 관린은 네 가지 전략을 직접 써보기로 했다.

 

1. 칭찬하기: 상대방을 띄워주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솔직한 말로 지훈이 준비한 음식은 관린의 입에 맞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서 온 사람이 전해준 반조리 된 음식을 그대로 익히거나, 세팅만 해서 내놓으면 됐음에도 뭔가 늘 부족했다.

 

“도련님, 맛있게 드세요.”

 

그래도 단 한 번도 맛이 없다고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글쎄. 뭘까. 관린이 젓가락을 들자 맞은편의 지훈도 이내 젓가락질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몇 번 마음에 안 든다는 뜻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며 신경쓰던 집사와 달리 지훈은 여전히 밥을 먹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오늘은 메뉴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난히 먹는 속도가 빠르다.

 

“박지훈씨, 맛있어요.”

“정말요?”

“네. 매번 똑같이 오는 것들인데 오늘따라 더 맛있네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대답이 없다. 오히려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관린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도련님. 심각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되려 관린이 긴장했다.

 

“음식 짜게 드시면 안 되는데.”

“네?”

“저 상당히 짜게 먹는 편인데 도련님도 그러셨어요?”

“...소금?”

 

그간 조금씩 이상했던 맛의 이유를 찾았다. 소금이라는 말에 드디어 표정이 밝아진 지훈이 아예 팔을 테이블에 올린 채 떠들기 시작했다. 항상 좀 싱겁길래, 그래도 원래 도련님 그렇게 드시는 줄 알고 소금 진짜 조금씩만 더 쳤거든요. 근데 오늘은, 제가 너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조금 더 넣었는데. 근데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전 좀 짠데. 앞으로 항상 이 정도씩 칠까요?

 

지훈이 눈치채지 못하게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건 아닌 거 같다. 오후 내내 방 안에서 냉수만 들이켜고 있는데 문제의 인간이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라는 말에 빼꼼 고개를 내민 지훈이 한여름의 해바라기가 가득 담긴 항아리 들고 들어왔다.

 

“정원에 나갔는데 너무 예뻐서 좀 꺾어왔어요.”

 

좀 꺾어왔다는 말과 달리 루비 에클립스, 링 오브 파이어, 이브닝선과 선빔까지 종류별로 잘도 꺾어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게 힘들어 보일 정도다.

 

“도련님 해바라기 좋아하세요? 되게 많던데.”

 

많을 수밖에. 가득 심어진 해바라기는 관상용이 아니다. 무성히 핀 해바라기를 잘 따고, 말린 후 만월의 직전 폭주를 방지하기 위해 마시고, 자기 통제를 벗어나 날뛰다 혹시 다쳤을 때 약으로 쓴다. 한여름의 해를 가장 높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이곳에 저택을 지은 이유 중 하나도 저 꽃이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있는 본가의 사람들이 볼 때마다 감탄하고 한 송이 한 송이 귀하게 여기는 꽃을 저렇게 막무가내로 꺾어왔다.

 

“좋아해요. 지훈씨도 좋아해요?”

“해바라기도 좋아하지만, 고흐도 좋아해요. 고흐 아세요?”

 

지훈이 방 한가운데 들고 온 항아리를 놓고 관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갱이요, 고흐네 집에 갔는데 방이 너무 더러워서 충격을 받은 거에요.”

 

뭔가 대단한 걸 말할 듯 또 몸을 가까이 내민 지훈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 아니라며 머리를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요, 둘 사이에 얘기는 일단 놔두고요, 고갱이 머문 방에는 해바라기 그림이 많았대요. 그리고 고흐가 해바라기를 계속 그렸던 이유는 고갱의 방을 장식해주고 싶어서였어요. 고흐가 고민을 되게 많이 했대요. 너무 고민해서 걱정 할 정도로요.”

“고갱은 좋아했대요?”

“네. 결국 고갱은 고흐를 떠났지만 6년인가? 시간이 지나서 자신이 머문 방에 대해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해바라기가 노란 벽지를 배경으로 해서 걸려있었다고 해요. 온 방안이 노란색이었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노란 커튼 사이로 아름답게 햇살이 비쳐들고, 황금빛 향기를 내뿜는 해바라기를 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바라기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평소랑 다르게 들린다. 인간보다 훨씬 발달한 청각은 듣기 싫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의 구분이 명확했는데, 지금 지훈의 목소리는 확실히 더 듣고 싶은 목소리가 되어 울린다.

 

“해바라기 그려드릴게요.”

 

더 듣고싶었지만 이내 지훈은 캔버스를 준비하고 물감을 짜더니 항아리에서 고개를 빼 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해바라기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향인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오후였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지훈의 손을 보던 관린은 조용히 일어나 서재로 가서 언젠가 봤을지도 모르는 고흐의 평전을 찾아 돌아왔다. 몇 시간이 지나자 팔을 허공으로 쭉 뻗은 지훈이 캔버스를 관린에게 내밀었다.

 

“이건 유화라 마르려면 한참 있어야 해요. 그래도 지금 드리고 싶어요.”

“저한테요?”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과, 늦은 해가 겨우 넘어가고 저녁이 시작되는 무렵이라는 시간, 열린 창문으로 이제야 뜨겁지 않은 바람 때문에 잠시 말없이 캔버스를 바라보는 관린은 어쩌면 지훈을 만나게 된 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고마워요.”

“잘 했죠?”

“그냥 꽃으로 보이지 않아요.”

“그럼요?”

“방금 읽었는데 고흐에게 노란색이 희망이라면서요? 박지훈 씨한테 노란색은 기쁨이나 설렘, 대담함인 것 같아요.”

 

그 말에 지훈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괜히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누르면서 물감을 정리하고 기름통을 치워야 한다고 움직임이 빨라지는 지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관린은 잠들기 직전이 돼서야 드디어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이만 나가보겠다며 사라져버린 지훈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칭찬, 제대로 했네. 별거 아니네. 상대의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일. 잘 했네.

 

같은 시간, 지훈은 침대에 누워 관리의 방에 걸려있을 그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남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렇게 손이 정신없이 움직였던 게 참 오랜만인거 같다. 그 순간만큼은 고갱에 대한 환영의 의미로 열정을 쏟아냈던 고흐만큼 자신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관린에게 좋은 걸 주고 싶었던 마음이 전부였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몇달 후, 고흐는 고갱과의 불화에 귀를 자르며 정신발작의 멍에를 짊어졌지만, 나는, 나는. 눈을 감자 고맙다고 환하게 웃는 관린의 얼굴이 펼쳐진다. 고갱과 고흐의 동거가 두 달이 채 되지 못했었던가?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2. 동조하기: 가치관과 신념이 비슷하거나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동조. 관린은 이번에는 확실히 하기 위해 간만에 사전을 폈다. 동조, 남의 주장에 자기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춤.

 

남의 주장, 박지훈의 생각.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애초에 환경이 다르고 보고, 듣고, 익힌게 다를건데. 괜히 헛된 노력은 해봤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고보니, 왜 하필 저 박지훈일까. 벽에 걸린 캔버스를 바라봤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물감을 섞고, 붓을 움직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대뜸 선물이라며 내밀 줄도 몰랐다. 그 순간만은 지훈의 얼굴에 어떤 숨김도 없었을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건 엑스. 관린은 미련없이 다음 장을 펼쳤다. 어쩌면 저 인간도 나에게 호감이 있을까?

 

 

 

 

3. 자신을 잘 표현하기: 하지만 지나친 자기 자랑은 하지 말라.

 

지금 다시 선택하라면 그마저도 두고 왔겠지만, 처음 저택에 들어올 때는 어린 마음에 평소 마음에 들었던 보석과 예술픔을 챙겨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의 집념이 들어있는 수집품들이라 옆에 두고 보기에 불쾌해서 한 곳에 모아두고 발걸음을 끊었다. 집사 혼자 관리했던 버려진 서쪽 방. 오늘만큼은 이곳에 모아둔 것들이 꼭 쓸모있게 느껴졌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귀한 것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늘은 지훈을 저택의 서쪽으로 데려왔다. 자신을 표현할 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 아낌없이 보여주기로 했다.

“이건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청혼할 때 줬던 반지에요.”

“우와.”

 

하지만 지훈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인다. 생전 처음 보는 보석들에 기뻐하면서 눈을 반짝거릴거라 생각했지만 무덤덤한 표정이다.

 

“이거, 줄까요?”

“아니요?!”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꺼낼 준비를 하고 물었는데 손사래를 친다.

 

“왜요? 아, 반지는 좀 그런가? 다른 거 뭐 좋아해요? 보석만 뺄 수도 있어요.”

“저는 진짜 괜찮은데요?!”

 

두 손을 휘젓는 격한 거절 의사에 관린이 조금 기분이 상한다. 그리고 그런 관린을 보는 지훈도 순간 어색해진 공기가 껄끄럽다. 관린은 지훈이 보석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른 걸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현금이 최고일까? 지훈은 어제까지 분명히 같이 방 안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책도 읽고 팬케이크도 해 먹으며 즐거웠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어렵네요.”

“네?”

 

잠시의 침묵이 끝나고 관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는 이미 알 만큼 알았고,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좋은것들이라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음에 든 거 있으면 주고 싶었고.”

 

그제야 지훈은 관린의 행동을 이해했다. 도련님이 나랑 더 가까워지고 싶은가보다. 사람은, 아 도련님은 온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상대에게 자신을 알려 주고 싶어 한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걸 싫어한다고. 그리고 묻는다. 너는 어때? 나랑 너는 서로 공통분모가 있을까?

 

“안 어려워요!”

 

방을 나서려는 관린을 잡았다. 어려운게 아니라, 어색해서 그런거라고 말 해주고 싶다.

 

“어려운게 아니라, 그냥 말로 하는게 어색해서 그런거에요. 해 보면 쉬워요. 제가 좋아하는 거 알려드릴게요. 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요. 도련님이랑 책 보는것도 좋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려워서 모르는 것들도 많은데, 그래도 좋아요. 산책하는 것도 좋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나?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속에 있는 생각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다 말 해놓고 나니 부끄럽지만 그 순간은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관린을 잡는 게 먼저였다.

 

“도련님과 같이 하는 것들, 좋아요. 처음 해 보는 것들이라 어색했는데 이제 안 그래요. 모르는 거 물어보면 알려주시는 것도 좋고, 저 기다려 주시는거 좋고.”

 

좋아요, 좋아요. 좋고, 좋고. 저 단어가 쏙쏙 박히고 자기도 모르는 새 굳어져 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한다. 좋아요. 다시 한 번 메아리치는 단어에 기분이 좋아진다. 방금 전 까지 몰랐는데 인간이랑 많은 일을 했다. 언제부턴가 서고에서 책을 찾아온 인간은 꼭 자기도 한 권씩 들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쑥 질문을 했다. 몇 걸음 뒤에 따라오는 건 여전하지만 말을 걸었다. 거슬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거슬리고 아니고를 떠나 가까이 와 있다는 자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좋아요?”

“네, 좋아요. 저 처음 들어왔을 때 집사님이 그랬어요. 도련님 상냥하고, 온화하다고요. 진짜 더 그래주셔서, 어,”

 

잠시 지훈이 입을 다물었고 관린은 가만히 지훈을 바라봤다. 저 다음에 나오는 말도 좋아요면 존스,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고마워 해 주지.

 

“고맙습니다.”

 

지훈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까닥거린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지만 그게 또 잘 어울려서 이만 나가자며 문 손잡이를 돌리는 관린의 손놀림이 부드러웠고, 뒤따르는 지훈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리고 서쪽 회랑을 가로지르는 둘의 속도가 똑같았다.

야수의 장미

By 에비델 

PanWink's Wonderland

​판윙 동화합작

made by @abg_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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