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x윙 동화합작
다음 날 왕자는 오후 한 시에 여우를 만나러 갔습니다. 여우는 아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와줘서 기뻐. 정말 고마워."
기쁘다는 말에, 고맙다는 말에 어린왕자는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습니다.
"너의 얼굴은 꼭 비에 젖은 장미 같구나."
"비?"
"너 비를 모르니?"
어린왕자가 사는 별에는 구름이 없었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는 한 번도 비를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구에 온 뒤에도 여우를 만나도록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왕자는 비를 몰랐습니다.
"응. 비가 뭐야?"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거야."
"물이 떨어진다고?"
어린왕자는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하늘에서 우물물을 길어다가 뿌리는 건가? 그런 일을 왜 하지?
"보기 전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인 걸?"
여우의 말에 어린왕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알아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너를 오랜 시간 보았으니까. 네가 나를 바라본 시간만큼, 나도 너를 바라보았거든. 너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것도 다 보았지."
"그렇구나."
어린왕자는 여우와 친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좀 더 옆으로 가도 되니?"
"이제 바짝 옆으로 와도 돼."
그 말에 어린왕자는 여우의 바로 곁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어린왕자의 팔에 보드라운 여우의 털이 살짝 살짝 닿았습니다.
"너에게 기대도 되겠니?"
"그래. 그러렴."
어린왕자는 작은 여우의 몸에 살짝 기대었습니다.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부드러운 털에 어린왕자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어린왕자는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익숙지 못한 감촉에 깜짝 놀랐어요. 분명 부드러운 털이 있었는데,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숙여졌던 고개가 약간 들려있기 까지 했지요. 놀라서 눈을 뜨니 어느 새 어둠이 깔린 하늘에는 두둥실 달이 하나 떠올라 있었습니다.
"일어났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이 있었습니다. 갈색의 다정한 눈이 아주 크고 유리처럼 투명한 소년이었어요. 어린왕자는 놀라서 얼른 낯선 소년의 어깨에 기댔던 얼굴을 떼었습니다.
"넌 누구야?"
"나야 여우."
"하지만 여우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훨씬 작고 주황빛 보드라운 털을 가지고 있다고. 넌 나와 비슷하게 생겼는걸."
"맞아."
포근한 달빛 아래 소년의 새하얀 피부가 투명하게 빛이 났습니다. 어린왕자는 자기 또래의 소년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소년이 낯설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말을 잃었죠. 어딘가 익숙한 갈색의 눈이 다정하게 느껴져서 어린왕자는 이 소년이 자신을 해치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달이 뜨면 이렇게 변해. 이게 나의 본 모습이야."
어린왕자는 언젠가는 나의 본 모습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 한 여우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움에 어린왕자는 작은 양손을 들어 입을 막았어요.
"처음 봐."
"아마 그럴 거야. 달이 뜨기 전에 네가 항상 돌아갔으니까."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어린왕자는 작은 손을 뻗어 소년의 볼을 감싸 쥐었습니다. 매끄러운 살결이 보드랍던 털과는 또 다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우는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어린왕자는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매일 매일 밤까지 함께 여우와 있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네가 일어났으니까 우리 저 언덕까지 함께 가볼래? 저기에 달맞이 언덕이 있거든."
"달맞이 언덕?"
"응. 달이 아주 잘 보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는 여우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하얀 맨발이 투명하게 달빛 아래 빛났습니다. 여우가 다 일어서도록 어린왕자는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같이 갈래?"
여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하얗고 기다란 양 손을 어린왕자에게 내밀었습니다. 어린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잡았습니다. 조금 서늘한 온도의 손이 단단히 어린왕자의 손을 말아 쥐고는 번쩍 일으켰습니다. 일으키고도 여우는 어린왕자의 오른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도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죠.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달맞이 언덕까지 걸어갔습니다.
"너는 신발이 없는데 발이 아프지 않니?"
"이곳의 땅은 푹신푹신해서 발이 아프지 않아."
"그렇구나. 내가 있던 곳은 좀 울퉁불퉁해. 메마르고 딱딱한 편이었어."
"신기하구나. 지구와 많이 다른가봐."
"응. 여기보다 훠얼씬 작아서 나는 하루에 해지는 것을 마흔네 번을 본 일이 있어. 사실 그 이상 보고 싶지만 하루에 최대한 그만큼 밖엔 볼 수 없어."
어린왕자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나머지 한 손을 들어 별의 작음을 표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여우는 활짝 웃었는데 여우의 뺨에 보조개가 피어나는 것을, 울창한 숲을 지나면서도 그 희미한 달빛 아래 분명히 보았다고 어린왕자는 내게 이백 번도 넘게 말해주었습니다.
"와!"
언덕너머로 탁 트인 넓은 들판위로 둥실 떠있는 달이 아름다워서 어린왕자는 환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쁜 것 같아."
옆에서 여우가 말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웬일인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어린왕자는 또 다시 오후 1시에 찾아갔습니다. 여우와 잔디밭을 뛰 놀다 둘은 줄지어 자리하고 있는 민들레 홀씨를 발견하였어요.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는 것을 알려주었지요. 따뜻한 바람이 불자 어린왕자는 신이 나서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홀씨를 불어 보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흥얼흥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무슨 노래야?”
“노래?”
“지금 네가 흥얼거리고 있어.”
어린왕자는 자신이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가 그제서야 깨닫고는 말했습니다.
“이거! 사실 이 별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별들도 들렀어. 거기서 만난 어떤 사람이 불러준 노래야.”
“듣기가 좋은 것 같아. 네가 만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니?”
“그 사람은 자신이 이 우주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그렇구나. 네가 보기에도 그랬니?”
어린왕자는 어젯밤 보았던 여우의 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진 못하였지만, 우주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은 여우의 본모습을 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왜인지 부끄러워서 어린왕자는 그 이야기까진 해주지 않았습니다.
“잘생긴 얼굴이긴 했어.”
“자기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따지자면 그래. 난 사실 내 작은 손이 불만이었는데 그 아저씨가 나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거든.”
“네 작은 손은 아주 귀여운 걸?”
여우가 자신이 작은 앞발을 들어 어린왕자의 작은 손에 올려놓고는 말했습니다. 어린왕자는 귀엽다는 말을 처음 들어 봤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여우를 보았습니다. 여우는 웃어 보이더니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어린왕자를 올려다보는 여우의 눈이 아름다웠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등을 한 번 쓰다듬어도 되느냐고 물었고,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는 묻지 않고 쓰다듬어도 된다고 말해주었어요. 어린왕자가 여우의 부드러운 털을 작은 손으로 여러 차례 쓰다듬었습니다. 여우는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그르렁 소리를 내며 눈을 살포시 감았어요. 어린왕자의 손길이 멈추자 여우는 느릿하게 눈을 뜨고는 물었습니다.
“혹시 너도 생일이 있니?"
"생일? 그게 뭔데?"
"말 그대로 태어난 날을 말해."
어린왕자는 기억이 시작되는 때부터 혼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린왕자가 살던 별에서는 일 년도 열두 달도 날짜도 요일도 없었기 때문에 생일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어요.
"내가 살던 곳에는 그런 게 없어."
"그럼 넌 네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겠구나."
"맞아. 난 언젠가 부터 존재했어."
"이 세상에 존재한단 건 특별한 일이야. 그 자체가 특별하단 것을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럴 수 있어. 이 별에서도 보통 스스로 자신의 생일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통은 그 시작점을 지켜본 사람이 알려주곤 하지."
어린왕자는 조금은 우울해졌습니다. 자신의 시작점을 바라봐 준 이는 왜 없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걸 꼭 알아야 해?"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저 그 시작점을 기념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 거지."
"존재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의식과 같은 거야. 혹시 기억하니? 시간을 정하고 만나면 더 기쁠 거라는 말. 그 특별한 시간, 일종의 의식이라는 말 말이야."
"기억해. 그래서 오늘도 오후 1시에 널 보러 왔는걸."
여우는 투명한 갈색 눈으로 어린왕자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주황빛의 털이 어느새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붉고 따뜻한 햇빛으로 반짝거렸습니다. 어린왕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여우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장미들이 소란스러웠습니다. 어린왕자가 석양이 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했던 것처럼 이곳의 장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늘 해가 질 때면 장미들은 감탄의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어린왕자는 고개를 돌려 약간은 찌푸린 채로 장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석양이 지는 너머로 벌써 하얗고 조그마한 달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석양을 바라보던 어린왕자는 아직도 쥐고 있던 여우의 앞발이 어느새 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변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여우는 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약간의 미소가 어린 새하얀 얼굴이 달빛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알 것 같아. 생일을 기념하는 것도 일종의 의식이구나?"
"맞아."
"넌 생일이 있니?"
"있어. 이곳 사람들의 시간으로 9월 23일이 내 생일이야."
"그게 언젠데?"
"아마도 네 달 뒤?"
"네 달?"
어린왕자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와 내가 만난 시간의 네 배 정도는 흘러야 할 거야.
네 배? 어린왕자는 조금 속상해졌습니다. 네 배라니. 어린왕자는 이미 별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우의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 자신은 이곳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린왕자를 슬프게 했습니다.
"나도 너와 함께 그 날을 기념하고 싶어."
"넌 돌아가야 하잖아."
어린왕자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어린왕자는 자신이 언제 돌아갈 거라고 여우에게 말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어떻게 알았어?"
"넌 처음부터 시간이 없다고 말했고 나에게 온전히 네 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니까. 곧 떠날 사람들이 보통 그렇지."
"내가 그랬다고?"
어린왕자는 되 물었습니다. 그건 비단 여우에게만 되묻는 건 아니었어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것이기도 했죠. 여우는 말없이 달을 보고 있던 고개 느릿하게 돌려 어린왕자를 보았어요. 아무런 표정이 담겨있지 않은 그 얼굴이 처음 여우의 본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린왕자는 문득 그런 여우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왕자는 그 날도 오후 1시에 여우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는 길 내내 어린왕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나 새파랗던 하늘이 아침부터 어둑어둑해지더니 햇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가 살던 별에서 그대로 보이는 우주 역시 까만색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우주의 어둠과는 또 다른 어두움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늘색이 이상해. 왜 이러는 거야?"
"이곳에서는 이상한 것만은 아니야. 가끔 이런 색이거든."
"가끔?"
"응. 오늘은 아마 비가 오려나봐."
"비가 온다고?"
"그래."
어린왕자는 여우가 말해준 비를 떠올렸어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더니 오늘이 그날인가 싶어 어린왕자는 설레는 감정으로 하늘만 바라보았어요.
"이리 더 다가와. 비가 오면 너의 몸이 젖게 돼. 이 사과나무는 잎사귀가 꽤 촘촘하게 붙어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어."
여우의 말에 어린왕자는 여우의 곁으로 더 바짝 붙었습니다. 여우의 오렌지색 밝은 털이 보드라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한층 더 어두워지더니 잔디로 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어린왕자는 깜짝 놀라 여우를 쳐다봤어요. 그 사이 또 다시 풀에 투툭 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린왕자는 소리를 따라 눈을 돌렸습니다. 곧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 쏴아 하며 연속된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는 어린왕자를 보고는 여우가 앞발을 들어 어린왕자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습니다.
"소나기인가 봐. 이렇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니 말이야."
"소나기?"
"순식간에 많은 비가 내렸다가 금방 그치는 비를 말해."
"비에도 이름이 있구나."
"종류라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여우에도 종류가 있는 것처럼."
어린왕자는 입안으로 소나기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사과나무 잎사귀에 맺히는 물방울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어린왕자는 천천히 일어나서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물방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너도 볼래 여우야? 내가 들어줄게.”
“좋아 나도 가까이서 볼래.”
어린왕자는 여우를 들어 올려 나뭇잎 가까이에 맺힌 물방울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쁘지?”
어린왕자의 말에 여우는 그렇다며 좋아했습니다.
“잔디에도 많이 맺혔어. 저길 봐.”
어린왕자가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여우가 말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처럼 잔디위에 엎드려 보았습니다. 와르르 쏟아지는 빗물이 튀어 사과나무 아래의 잔디에 방울방울 빗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와! 정말 예쁘다!
그 순간 어린왕자의 콧잔등에 툭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어찌나 커다란 물방울이었던지 어린왕자의 콧대에 부딪혀 튀어 올라 그 속눈썹에 까지 튀었습니다.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 빽빽히 들어찬 나뭇잎사이로 난 작은 틈에 물방울이 매달려있었습니다.
"밤에 비가 오면 좋았을 걸."
"왜?"
"그랬다면 내가 네 콧잔등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줄 수 있었을 테니까."
다정한 여우의 말에 어린왕자는 왜인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의 다정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기 어린 공기가 무거워서 나무 아래를 가득 메우는 기분이었어요. 어린왕자는 팔을 뻗어 습기로 뻣뻣해진 여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밤에 비가 오는 것도 보게 될 거야. 나는 그 때 까진 네 곁에 있을 거니까."
"하지만 넌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도 밤에도 비가 오는 날까진 있을게."
"정말이야?"
"응. 약속해."
어린왕자는 여우의 앞발을 붙들고는 그랬습니다. 여우는 어린왕자의 손에 얌전히 앞발이 붙들린 채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난 밤에 비가 안 왔으면 좋겠어."
"왜?"
어린왕자는 여우도 자신의 별의 장미처럼 변덕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는 밤에 비가 왔으면 좋겠다더니, 이제 와서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니. 어린왕자는 여우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여우가 어린왕자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금 비가 오는 나무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가지 않을 테니까."
"…."
어린왕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비가 오는 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여우가 왕자에게 기대왔습니다.
"나를 안아줘. 그러면 내 체온이 널 따뜻하게 해줄 거야."
어린왕자는 여우를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여우의 말대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어린왕자는 더 이상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습기로 뻣뻣해진 여우의 겉 털 아래로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있는 속 털까지 손을 집어넣어 끌어안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조금은 빠르고 크게 울리는 여우의 심장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 소리에 눈이 절로 감긴 어린왕자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
"…."
눈을 뜨자마자 어린왕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과 마주했습니다. 어느 새 주변은 조용해져 있었고 캄캄한 밤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안겨있었어요.
"여우야?"
"맞아. 나야."
"왜 네가 날 안고 있어?"
"내가 너보다 커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여우의 본 모습은 어린왕자보다 한 뼘은 더 컸습니다. 하얗고 커다란 손이 자신을 단단히 안아들고 있는 것을 느낀 어린왕자는 왜인지 얼굴이 달아올랐어요.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어?"
"너를 내가 안은 때부터."
여우는 달이 뜨면 본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정확히 달이 뜨고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사과나무 아래에서 보이는 달이 겨우 끄트머리만 드러나는 걸 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고 어린왕자는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어린왕자는 궁금해졌습니다.
"그 때 부터 날 계속 보고 있었어?"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여우의 답변에 어린왕자는 물었습니다.
"왜?"
그 물음에 여우의 커다란 눈에 들어찬 갈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었습니다.
"너를 기억하기 위해서지."
"나를 기억한다고?"
"그래."
"왜 나를 기억하는데?"
여전히 여우에게 안긴 채로 어린왕자가 물었습니다.
"네가 내 곁에 계속 있을 거라면 나는 널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지 몰라. 언제고 내가 널 떠올리고 싶을 때 나는 그저 고개를 돌려서 널 보면 되니까. 하지만 네가 여기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널 기억하려고 노력할거야."
“….”
"언제든지 너를 떠올리고 싶을 때 너를 생각해낼 수 있도록."
어느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어린왕자는 어느 새 아침부터 여우를 찾아가고 있었어요. 그 날도 이른 아침부터 여우를 찾아가던 어린왕자는 내리는 비를 피하려 커다란 연꽃 잎사귀를 머리에 얹고는 달렸어요. 사과나무 아래 여우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린왕자를 본 여우가 벌떡 일어섰어요. 어린왕자는 사과나무 아래로 들어와 몸의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와."
"그러게 말이야."
"여기 앉아서 무엇을 보고 있었니?"
"네가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방금 왔는걸?"
"그 전에는 저 장미들을 보고 있었어."
어린왕자는 처음 저 장미들을 보았을 때 너무나 속이 상해서 엉엉 울고 말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장미가 싫어."
"왜?"
"내가 사는 별에는 작은 꽃들이 많아."
어린왕자는 작은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꽃의 크기를 설명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여우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어요.
"왜 웃는 거야?"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귀엽다는 말을 이전에도 들었지만 이제는 웬일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고마워. 아무튼 요만한 꽃들이 많단 말야."
"그래그래."
"근데 어느 날 아주 크고, 붉고, 아름다운 꽃이 나타났어."
"그 꽃이 장미니?"
"맞아. 그 꽃은 나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아름답고 오로지 유일하다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게 거짓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 매일 저 담장을 볼 때면 내가 살던 곳의 그 꽃이 떠올라. 그래서 싫어."
어린왕자의 말에 여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아해야 하는 것 같은데."
"왜?"
"그 꽃을 떠올릴 수 있잖아."
"그게 왜?"
"너는 그 꽃을 좋아하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린왕자는 놀라서 바로 물어보았습니다. 여우는 말하였어요.
“유일한 꽃이 아니어서 슬펐다는 것은 네가 그만큼 그 꽃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속상할 일도 없지. 너는 그만큼 그 꽃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거야.”
“네 말이 맞아. 난 꽃의 말을 믿었어. 물론 허영심이 있는 꽃인 줄은 알고 있었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너는 예전에도 나에게 말해주었잖아. 네가 그 꽃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말이야. 그런 일들이 그 꽃을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해주었지. 그러니까 그 꽃은 너에게 있어 유일한 꽃인 거야.”
“정말 그럴까?”
“물론이지.”
여우의 말을 듣자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에 두고 온 장미가 몹시 그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장미를 두고 지구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장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린왕자는 갑자기 주정뱅이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후회하고 있구나?”
“조금?”
“돌아가고도 싶구나?”
“조금?”
여우는 어린왕자를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비가 오는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여우는 어린왕자와 곧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습니다.
"이름은 의미를 새겨주지. 예를 들어 내가 그냥 여우라면 그것에 그칠지 모르지만 나에게 이름이 있으면 넌 그 이름을 떠올리며 나를 생각할거야. 또한 네가 여우야 라고 부르면 이 세상 모든 여우가 너를 쳐다보겠지만 내 이름을 부르면 나만이 너를 쳐다보겠지."
"아. 이름이란 건 그 존재를 정의해주는 것이구나."
"이름만으로 완전히 정의 할 수는 없을 거야. 어떤 존재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지. 그저 빌릴 뿐이야. 그 존재를 부를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주는 거지."
"어려워."
"맞아. 어려워. 하지만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은 내가 수많은 지구상의 여우들 중에 너에게 있어 특별한 여우라는 것을 의미하게 될 거야."
'특별한 여우….'
어린왕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어요.
"특별한 여우가 되면 뭐가 좋은데?"
"행복해지겠지. 너에게 있어 나는 마치 저 담장에 수많은 장미꽃이 아니라 너의 별에 있는 너만의 장미꽃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니까."
"아하.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잖아."
"맞아. 그렇지만 그 시간을 좀 더 단축시켜주지. 아마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지구상에는 수 십 명, 혹은 수 백 명의 어린왕자가 있어. 내가 너에게 어린왕자야 하고 부르는 것보단 너만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네가 그 수많은 어린왕자들과는 달리 특별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할 거야."
"그렇긴 한데 말장난 같아. 나와 같은 이름이 있을 수 있잖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이름이라는 건 소중한 거야."
"너는 이름이 있어? 그냥 여우가 아니야?"
"나는 그냥 여우이기도 하지만 이름이 있어."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네가 내 이름을 알게 되면 너는 날 길들이게 될 거야. 더 이상 너에게 그냥 여우가 아니게 되는 거지. 그래도 알고 싶어?"
"응. 그래도 알고 싶어."
"내 이름은 라이관린이야."
"라이관린?"
"응."
어린왕자는 조심스레 이름을 되뇌었어요. 라이관린, 라이관린.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어요.
"처음 들어봤어."
"그렇담 다행이네. 너에게 라이관린은 나 하나 뿐 일 테니까. 이제 날 라이관린이라고 불러줘."
"여우라고 부르지 말고?"
"너의 선택이야. 하지만 난 라이관린이라고 불리고 싶어. 관린아. 하고 부르면 돼."
"관린아."
어린왕자가 조심스레 여우를 불렀습니다. 여우는 그동안 본 중 가장 환하게 웃었어요. 달빛에 비친 하얀 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쏙 필 정도로요. 그 웃음에 어린왕자는 가슴 가득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이상해."
"왜?"
"모르겠어. 막 답답해졌어. 그런데 기분이 나쁘진 않아."
"네가 날 길들이는 과정의 일부야."
"그렇구나."
둘은 나란히 앉아 다시 담장의 장미를 바라보았습니다. 달빛에 비친 장미들은 모두 깊이 잠이 들어 소란스럽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낯의 장미보다 밤의 장미를 바라보는 시간이 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린아."
"응?"
"나도 이름이 갖고 싶어."
"너는 이름이 없어?"
"응. 난 태어나서 여지껏 혼자 살아왔어. 들꽃들도, 인형들도, 장미 한 송이도 있긴 했지만, 내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어. 그래서 이름이 없어."
"그렇구나. 나는 이름이 없는 어린왕자는 처음 봐. 예전에 다른 곳에 살았을 때 그곳의 어린 왕자는 매우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지구의 어린왕자들은 모두 이름이 있나봐."
어린왕자는 조금 시무룩해졌습니다.
"내가 지어줄까?"
"네가?"
"응. 나는 너에게 길들여지길 원해."
"그래 그럼 네가 지어줘."
다음 날 어린왕자는 그동안의 다른 날들과 달리 오후 다섯 시에 여우를 찾아갔습니다. 여우는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가 낮잠을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달이 둥실 떠 있었고, 옆에 본모습으로 돌아온 여우가 있었어요.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
"고마워. 나도 그랬어."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니?"
"맞아. 네가 다섯 시에 온다고 해서 난 세시부터 기다렸어. 어김없이 그 때부터 몹시 행복해졌지. 담장의 수다스러운 장미들도 모두 귀여워 보일 정도였어. 아마 네 시쯤에 잠이 든 것 같아."
"그렇구나."
어린왕자는 다른 때보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어."
"지었니?"
"응. 박지훈. 박지훈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린왕자는 박지훈을 여러 번 불러보았습니다.
"왜 박지훈인 거야?"
"일부러 흔한 이름을 찾았어."
"하지만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다 널 쳐다볼 텐데?"
"그런 위험은 없어. 나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아. 마주치는 것과 만나는 것은 달라. 만난다는 것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하지. 마주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맞닥뜨리는 거야."
"어려워."
"한 마디로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거야. 우리는 늘 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만나지.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야. 그저 나무들과 풀들과 장미 덩쿨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 앞에서만 이 이름을 부를 거라는 말이야."
"아."
어린왕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숨을 후 내쉬었습니다. 여우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화가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왕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왕자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던 여우는 이내 말했습니다.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야. 흔한 이름으로 지은 건 그 단어를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야. 너는 결국 너의 별로 돌아갈 거고, 그러면 난 너를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거야. 기억은 불완전해. 떠올릴 수 있는 도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나는 아마 네가 없더라도,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마주칠 때 마다, 그런 이름이 들려올 때 마다 너를 떠올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여우의 커다랗고 투명한 갈색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어린왕자는 가슴이 또 다시 답답해졌어요.
"나도 너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나는 너에게 길들여지길 원했지만, 네가 나에게 길들여지길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겠지. 원래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여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려 여우의 하얀 볼을 타고 내렸어요. 어린왕자는 장미를 두고 별을 떠나올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 때 보다 꼭 몇 배는 더 마음이 아파졌어요. 어린왕자는 작은 손을 들어 여우의 볼을 닦아주었습니다. 여우는 그 손을 붙들고는 해맑게 웃었습니다.
결국 여우와의 시간에도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둘은 온종일 함께 있었어요. 비로 인해 달이 더 일찍 뜬 그 날, 다른 날들과 달리 둘은 말이 없이 비가 오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이따금씩 어린왕자에게 빗물이 튀면 여우가 기다란 손을 뻗어 닦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5월 29일이야. 기억해둬. 우리가 작별하는 날이니까."
"이것도 특별한 날이야?"
"맞아. 난 너에게 길들여졌으니 적어도 나에겐 특별한 날일거야."
"그럼 이것도 기념하는 날이야?"
"맞아. 적어도 나에겐 그렇겠지."
"그럼 이것도 일종의 의식인거야?"
"맞아. 기념일이니 아마도 그렇겠지."
"일종의 의식은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기뻐하려고 하는 거랬잖아. 하지만 작별은 그걸로 끝인걸. 그런데 왜 기념하는 거야?"
어린왕자의 마지막 질문에 여우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흔들림이 없던 얼굴이 조금은 놀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것 같아 어린왕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여우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잠긴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답했습니다.
"아마… 매 해 5월 29일이 오면, 나는 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겠지."
"…."
"그리고… 행복해질 거야. 나는… 마지막의 네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날 하루 동안은… 널 기다릴 거니까."
여우는 말을 꺼내는 것이 몹시 힘들어 보였어요. 어린왕자는 왜인지 다가가 여우의 커다란 몸을 끌어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왜 날 기다려?"
어린왕자는 궁금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또 물어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우가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기심이 그 마음을 이겨내고 말았어요.
"…."
"…."
여우는 물끄러미 어린왕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에 어린왕자도 여우를 바라보았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은 매우 길어져서 어느 새 달이 저물고 동이 트려했습니다. 그 시간이 신기하게도 지루하지가 않았습니다. 여우가 그제서야 잔뜩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놔주고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는… 네게 길들여지고 말았으니까."
여우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소리 없이 잔뜩 흘러내리는 눈물이 마치 여우와 함께 보았던 비가 내리는 장면 같다고 어린왕자가 생각할 때에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슬픈 얼굴로 눈물을 흘리던, 그 눈물을 커다란 손으로 훔쳐내던 여우의 체구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희고 투명하던 그의 살결에 오렌지 빛의 털이 수북히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손은 작은 앞발로, 기다란 다리는 뒷다리로 변했습니다.
“자 이제 담장의 장미들을 보고 나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러 와주렴. 그러면 나는 너에게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줄게.”
어린왕자는 여우의 말대로 담장의 장미들을 보러 갔습니다. 이제 막 태양이 떠올라서 인지 잠에서 방금 깨어난 장미들은 아직 조용했어요.
“이제야 나는 알겠어. 아무도 너희를 위해 죽어주진 않을 거야. 너희들은 그저 수많은 장미일 뿐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의 별에 있는 꽃은 나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야. 그 꽃이 나와 나눈 대화, 내가 그 꽃에게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준 시간들이 그 꽃을 소중하게 만들었어. 너희들은 그 꽃과 같이 아름다울진 몰라도 속은 텅 비었어. 나는 나의 꽃을 길들였던 거야.”
장미들은 저마다 화를 내어보았지만 어린왕자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다시 여우에게 돌아와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여우가 말했습니다.
“이제 비밀을 말해줄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볼 수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네가 너의 장미에게 들인 시간과 노력이 바로 그런 것이야.”
“오로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왕자는 잊지 않기 위해 중얼 중얼 되뇌어 보았습니다.
“맞아.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이 있어. 넌 너의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절대로 잊지 마.”
“나는 내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다.”
어린왕자는 잊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중얼중얼 되뇌어 보았습니다.
11
그 뒤로 어린왕자는 지구를 좀 더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뱀을 만나 다시 자신의 별로 돌려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여우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몸은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어린왕자는 뱀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신이 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돌아온 자신의 별에서 장미는 이미 생을 마치고 스러져 있었습니다. 어린왕자는 많이 울고, 많이 후회했지만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어요. 지리학자의 말대로 꽃은 일시적인 것이었죠. 어린왕자는 문득 황제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원치 않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왕자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분화구 청소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침대위에서 엉엉 울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해가 지는 모습 역시 며칠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게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어린왕자는 꿈에서 점등인을 보았습니다. 꿈에서 본 점등인은 예전에 보았던 것과 같이 성실하게 불을 켜고 끄고 있었습니다. 고요하고 작은 별에서 오로지 점등인 만이 자신의 일을 다 해내고 있었지요. 짧은 꿈을 꾸고 일어난 어린왕자는 성큼성큼 삽을 들고 걸어가 분화구를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아 아침나절에는 끝났어야 할 일이 하루 종일 걸릴 지경이었어요. 그렇게 마흔 네 번의 석양이 모두 지도록 분화구 청소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 나니 어린왕자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어린왕자는 생각했습니다.
또 다시 전과 같은 나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어린왕자는 전처럼 아침에는 분화구를 청소하고, 바오밥나무 씨앗이 혹시 어디서 날아오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흔 네 번의 석양을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공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미 때문일까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별에는 더 이상 장미가 없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언덕에 앉아 여우와 함께 장미를 바라보던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소란스러운 게 싫어서 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여우의 말도, 자신이 비오는 날의 장미를 닮았다고 하던 여우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도 떠올랐습니다. 어린왕자는 이 소행성에도 장미꽃이 많이 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별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가끔 여우와 함께 한 비오는 날이 떠올랐습니다. 빗소리에 잘 들리지 않던 여우의 목소리도, 물을 먹어 뻣뻣해졌던 부드러운 주황빛 털도, 빗방울이 튄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던 여우의 희고 커다란 손도 떠올랐습니다. 어린왕자는 우주에도 이 소행성에도 비가 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별에는 푸른 잎사귀들이 없었습니다. 어린왕자는 가끔 물방울이 맺혀있던 이파리들이 떠올랐습니다. 푸른색이 인상적이던 이파리들은 물방울이 맺혀있다 또르르 떨어질 때마다 생기 있게 움직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기해하던 어린왕자를 보던 여우의 눈빛이 따스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이 별에도 푸른 잎사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별에는 달맞이 언덕이 없었습니다. 어린왕자는 가끔 여우와 함께 올라갔던 달맞이 언덕이 떠올랐습니다. 신을 신지 않아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던 여우의 커다란 발, 이 소행성과는 달리 푹신푹신 보드랍던 지구의 땅,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쁘다고 해주며 활짝 웃던 여우의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왕자는 이 별에도 달맞이 언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꽤 긴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어린왕자는 여우와 함께 민들레 홀씨를 불고 놀던 꿈을 꾸었습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꾼 꿈은 점등인이 나온 꿈이었습니다. 한참 만에 꾼 꿈에 어린왕자는 웬일인지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어린왕자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공허한 이유도, 이 별엔 없는 것들을 그리워한 이유도 여우였다는 것을요. 자신이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결국 여우였다는 것을요.
어린왕자는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워했던 지구의 것들에는 여우가 있었습니다. 그리워 한 것 중 여우가 없던 것은 없었습니다.
어린왕자는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자신이 여우를 길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자신 역시 여우에게 길들여져 버렸단 것을요. 누군가를 길들이는 건 자신 역시 그 누군가에게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어쩌면 이 드넓은 우주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길들인 건, 자신을 누군가가 길들인 건, 서로를 길들인 것은 장미가 아니라 여우뿐이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곧 여우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어린왕자는 여우를 길들였습니다. 장미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우에 대해서도 어린왕자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나는 여우를 사랑하고 있나봐.'
하지만 어린왕자는 곧 두려워 졌습니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우는 긴긴 시간동안 자신을 잊었을지도 몰랐습니다.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길들였다는 생각이 착각일지도 몰랐습니다. 어린왕자는 분화구를 깨끗이 정리해놓고 바오밥나무 씨앗이 있는지 철저하게 검사했습니다. 그리고는 황제가 있던 별로 갔습니다.
12
"안녕."
"…."
사과나무 아래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여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안녕, 라이관린."
어린왕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던 여우에게 다시금 인사를 건넸습니다.
"네가 왜 여기…."
"박지훈이라고 불러줘. 네가 지어줬잖아."
여우는 천천히 사과나무 아래로 걸어 나왔습니다. 생기를 잃은 주황빛 털이 애처로워보였어요. 어린왕자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훈이 네가 왜 여기…."
"미안해. 내가 말하지 않고 와서 너에게 기뻐할 시간을 주지 못했어. 그렇지만 미리 말할 수가 없었어. 오늘이 며칠인지 알고 있니?"
"난 잘 모르겠어."
여우는 기운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 모습에 어린왕자는 좀 더 여우에게 다가갔습니다.
"오늘은 5월 29일이야. 네가 기억하라고 했잖아."
"그랬었지."
"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릴 거라고 했잖아."
"그랬었지."
여우는 느릿느릿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땐 몰랐어. 길들여지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줄은. 난 너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가 없었어. 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이,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함께 떠오를 줄 그 땐 몰랐거든."
그렇게 말하는 여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져서 흘러내렸습니다. 어린왕자는 한 걸음 더 성큼 다가가 주저앉아 여우와 눈높이를 맞추었어요. 그러고는 여우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저는 두려워요. 여우가 저를 잊었을까 봐요. 저는 이미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결과를 경험했어요. 그것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두려워요.’
‘그런 결과를 겪었다 해도, 이겨내서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그것이 두려워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여우에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 그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길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용기를 내어 다녀오세요. 혹여 또 다시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저에게 오세요. 이 별에서는 석양을 한 번만 볼 수 있답니다. 그만큼 소중한 경험이죠. 그걸 함께 보도록 해요.’
어린왕자는 그것이 황제와 마지막 만남이었구나 생각하고는 여우에게 담담히 말했습니다.
"나도 너와 마찬가지야. 나도 그 땐 몰랐어. 누군가를 길들이는 것은 나 또한 그에게 길들여지는 일임을 그 땐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어린왕자의 뒤로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습니다.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어린왕자의 금발머리와 잘 어우러졌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 어린왕자는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5월 29일을 내 생일로 정했어."
"왜?"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하는 거라고. 난 그 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어. 왜냐면 너에게 길들여져버렸거든."
말을 마치고 여우를 바라보는 어린왕자의 눈빛은 다정했습니다. 그 눈빛 뒤로 이제는 둥글고 밝은 달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어요. 여우의 주황빛 털이 순식간에 그의 옷으로 바뀌었고, 더 이상 어린왕자가 눈높이를 맞추려 앉아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린왕자가 일어서도 여우와 눈을 맞출 수 없게 여우는 커져버렸어요. 익숙했던 여우의 새하얗고 잘생긴 얼굴이 반가워서 어린왕자는 벌떡 일어서서 여우를 올려다보았어요. 여우는 그런 어린왕자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죠.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슬퍼보이진 않았어요. 오히려 기뻐보였죠.
"내가 살던 별엔 나를 박지훈이라고 불러줄 이가 아무도 없었어. 원래부터 그랬는데도 나는 그게 이상했어."
"…."
"그렇다고 누가 날 불러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어. 작은 꽃들에게 부탁해서 몇 번 이름을 들어보았지만 그게 좋지 않았거든. 그럴수록 네가 떠올랐어. 네가 나를 박지훈이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어. 그래서 나는 알았어. 오직 너만이 불러주는 내 이름이 나에게 의미 있는 거란 걸."
"지훈아."
"그리고 난 다른 누군가 너를 부르지 않기를 바랐어. 나만이 너를 라이관린이라고 부르길 바랐어."
"박지훈."
"내가 살던 별엔 비가 오지 않았어. 원래부터 그랬는데도 나는 그게 이상했어."
"…."
"별이 가득 박힌 우주를 바라보면서 비가오던 날을 떠올렸어. 푸른 잎사귀에 빗방울이 맺히던 모습을 떠올렸어. 그럴수록 네가 떠올랐어. 비오는 밤 너와 함께 비를 피하느라 달리던 것도, 그 때 붙잡았던 손도 떠올랐어. 그래서 나는 알았어. 너와 함께였기 때문에 내가 비오는 날을 그리워했단 걸."
여우는 커다란 양손을 뻗어 어린왕자의 양손을 느릿느릿 감싸 쥐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여우의 새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어요. 조금 웃음이 새어나올 뻔하기도 했죠.
"그리고 난 네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비오는 걸 바라보지 않길 바랐어. 나와만 함께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조금은 힘을 주어 말하느라 긴장이 어렸던 어린왕자의 얼굴이 말을 마치고 나자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이제 어린왕자는 미소 짓고 있었어요. 약간의 수줍음이 어린 미소에 발그레해진 얼굴은 오롯이 여우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놓고는 커다란 양 손으로 어린왕자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어요. 어린왕자의 오갈 데 없어진 손은 어느 새 여우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죠.
"너는 내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기쁠 거랬잖아. 내가 온단 말없이 오면 그건 어떨까 생각했어."
여우는 말없이 어린왕자를 보았습니다. 그 눈빛이 너무도 다정하고 달콤했죠.
"그런 생각도 했어. 네가 기뻐했음 좋겠다고."
여우가 활짝 웃으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기뻐. 정말 많이."
말을 마친 여우의 입술이 어린왕자의 입술에 얼른 와서 닿고는 떨어졌습니다. 어린왕자의 깜짝 놀란 얼굴에 여우가 볼우물이 움푹 패이도록 웃으며 말했습니다.
"많이 기뻐. 널 사랑하니까."
13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요? 어린왕자는 더 이상 어린왕자가 아니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어른이 되었거든요. 어째서 어른이 되었냐고요? 그건 어린왕자가 여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어린왕자는 여우를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진정한 사랑은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대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어린왕자가 제게 그랬어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인 채로 머무를 순 없는 거라구요. 어른이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라고요.
여우요? 여우는 더 이상 여우의 모습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낮에도 본모습인 채로 남게 되었죠. 왜냐고요? 여우의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에요.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지고 말았거든요. 그런데 어린왕자 역시 여우에게 길들여지고 말았죠. 그것은 아마 여우의 진실 된 마음 덕인 것 같아요. 여우는 사랑이 이루어지면 본모습으로 온전히 돌아온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여우가 제게 그랬어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까지 아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래요.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예요. 제가 누구냐구요? 왜 그 전까지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느냐고요? 혹시 비행사를 아시나요?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 비행사 아저씨요. 그 사람이 제 할아버지에요. 그거 아세요? 비행사 아저씨 역시 그 때 어른이었단 걸요. 어른들은 결국 알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걸 전 다 안다 이거죠.
어떤 때보면 어른이 어른을 더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어른들은 정말 말이 거의 안 통하긴 해요. 그런 어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어린왕자와 여우를 만나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모든 어른이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어른이 되는 것은 한 편으론 슬픈 것일 수 있어요. 전 아직도 제가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면 좀 슬퍼지긴 해요. 그래도 피하는 것은 안 돼요. 진짜 어른이 되어야 겠구나 마음먹을 뿐 인거죠. 어린왕자는 그렇게 말했어요. 이 세상에는 가짜 어른이 많다고요. 자신이 진짜 어른인 척 으스대지만 사실 진짜 어른은 몇 없다고 했어요. 사실은 자신도 진짜 어른이 된 건진 알 수 없다고도 했어요. 그래도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도 했죠. 그리고 제가 진짜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말했어요.
여러분은요? 어른이 되기를 피하고 있나요? 진짜 어른인가요? 아니면 아직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요? 어디에도 정답은 없을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거든요. 사실 제가 어찌 알겠어요. 전 아직 어린앤 걸요.
하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았을 때 금발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어린왕자가 떠오른다면, 비가 오는 날 물기가 가득한 주황빛 털을 가진 여우가 떠오른다면, 달이 떠오를 때 새하얀 피부의 잘생긴 얼굴을 한 여우가 떠오른다면 어쩌면 진짜 어른에 가까운 건지도 몰라요.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주변을 잘 살펴보세요! 어린왕자와 여우는 우리의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거든요.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요. 혹여 만나거든 제게 알려주세요.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잖아요. 저랑 같이 커피, 아 아니, 아이스초코 한 잔 하자구요!
다음 날 어린왕자는 오후 한 시에 여우를 찾아갔습니다. 작은 여우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있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와줬다면 좋았을 거야."
"어째서?"
"그러면 내가 널 기다릴 수 있으니까."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니?"
"특별한 시간을 정하는 거야."
"특별한 시간?"
"일종의 의식 같은 거지."
어린왕자는 특별한 시간도, 의식도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죠.
"그게 왜 필요한 거야?"
"지구의 시간에는 요일이 있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7일이 존재하지. 보통 사람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쉬어. 그래서 금요일이 저녁이 되면 기뻐지곤 해. 다음날 쉴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네가 오후 네 시에 오겠다고 하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기뻐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될지 몰라. 그렇지만 오늘처럼 아무시간에나 갑작스럽게 온다면 나는 충분히 기뻐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될 거야."
"조금은 알 것 같아. 내일부터는 시간을 정하고 만나자. 네가 충분히 기뻐할 수 있도록. 나는 너와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러니까 내일도 오후 한 시에 올게."
"고마워. 너는 상냥하구나."
어린왕자는 여우의 고맙다는 인사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린왕자는 태어나 이제껏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에서 왕자가 이야기할 이라곤 장미뿐이었기 때문이죠. 고마워라는 말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인사인 줄은 처음 알아서 어린왕자는 여우가 더욱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옆으로 가도 되니?"
"물론이야. 성큼 옆으로 와도 돼."
8
지리학자의 추천대로 어린왕자는 일곱 번째로 지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 지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닥은 온통 누런 모래들로 가득했고, 이따금씩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지요. 어린왕자는 그 황량한 느낌이 낯설었어요.
"분명히 지리학자가 지구엔 많은 것들이 살고 있댔는데."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 새 발밑으로 달빛과 같은 금빛고리모양의 무언가가 스르르 다가왔어요.
"안녕?"
"안녕?"
"넌 이곳의 사람이 아니구나."
"맞아."
다른 이 같았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을 텐데 왠지 그것은 매우 똑똑해보여서 어린왕자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너처럼 생긴 것은 처음 봐. 너는 무엇이니?"
"나는 뱀이야."
뱀은 새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목소리와는 달리 어린왕자를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습니다.
"이곳에 왜 오게 되었니?"
"어떤 꽃과 다투었어."
"가끔은 그런 일도 일어나긴 하지."
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어린왕자를 걱정하는 눈빛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어요. 뱀이 또 물어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살 거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돌아갈 거야."
"이곳은 적응하기가 힘들어."
"그렇구나."
"네가 살던 곳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좀 각박해."
어린왕자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다시 보아도 온통 뱀과 같은 빛의 모래뿐이었습니다.
"그런 거 같아."
"환경도 환경이지만 지구는 좀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만약에 네가 여기서 인연을 맺는다면 그 땐 돌아가는 것이 더 힘들어지겠지."
"인연?"
"그래. 그런 때에는 네가 이곳에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아."
어린왕자는 인연이라는 말도, 적응이라는 말도 모두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인연을 맺으면 적응이 된 것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려워."
"그럴 수 있어. 아무튼 나중에 네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네가 살던 별로 돌아가고 싶다면 나를 찾아 와."
"너를?"
"그래. 난 너를 네 별로 돌아가게 해줄 수 있으니까."
"고마워."
"별 말씀을."
9
어린왕자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물도 건너도 산도 건너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걸은 것인지 모르게 걸었습니다. 그렇게 걷다보니 넓은 초록빛 언덕이 나타났어요. 언덕에는 커다란 담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담장을 보고 어린왕자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어요.
"너희들은 누구니?"
"보면 모르니? 이상한 아이구나. 우리는 장미야."
장미라니. 어린왕자는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어요. 그곳에는 어린왕자가 매일 같이 정성스레 물을 길어다주고, 말동무가 되어주고, 투명한 유리 바람막이까지 만들어 준, 자신의 별에 하나 뿐인 크고 화려한 꽃이 수 백 송이, 아니 수 천 송이 피어있었어요.
"너희가 장미라고? 하지만 너희는 너무 많은 걸?"
"맞아. 우리는 많아. 하지만 장미는 원래 많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장미를 다 세려면 하루가 지나도 모자랄걸?"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꽃을 떠올렸어요. 분명 자기는 유일하다고, 특별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에 똑같이 생긴 꽃이 엄청나게 많이 피어있는 걸. 그렇게 생각하자 어린왕자는 너무 속이 상했어요.
"그럴 리가 없어! 유일하지 않은 꽃일 리가 없다고!"
어린왕자는 언덕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어요.
10
여우가 나타난 것은 그 때였어요.
"안녕."
"…."
어린왕자는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보았어요. 거기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여기 사과나무 밑이야."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는 주황빛이 도는 보드라운 털을 가진 작은 짐승이 있었어요.
"넌 누구니? 아주 예쁘게 생겼구나."
"나는 여우야."
"여우?"
어린왕자의 침대 위에 수많은 인형 중에 여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왕자는 여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어요.
"응."
여우는 대답을 하고 나서 사과나무 그늘 밖으로 나왔습니다. 갈색의 눈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습니다. 눈이 아름다운 여우라고 어린왕자는 생각했습니다. 어린왕자는 너무 외로웠어요. 여우를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모든 것들은 그 나름대로 훌륭한 것들이었지만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왕자는 여우의 눈과 보드라워보이는 털이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했어요.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너무 외로워."
"나는 너와 놀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아 그렇구나."
어린왕자는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어렵게 낸 용기가 짓밟히는 기분도 들었지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여우가 말했어요.
"너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구나?"
"맞아. 나는 작은 별에서 왔어."
"여기 사람들은 총을 들고 나를 쫓아. 그런데 넌 총이 없어. 그래서 난 알 수 있지. 가끔 총이 없는 사람들도 종종 마주치긴 하지만."
어린왕자는 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려다가 더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습니다.
"길들여지는 게 뭐야?"
"인연을 맺는다는 거야."
"인연을 맺어?"
뱀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인연을 맺으면 이곳을 떠나기가 어렵댔는데.
"그래. 지금 너는 나에게 그저 수많은 어린 소년 중에 한 명일 뿐이고, 나 또한 너에게 수많은 여우 중에 하나일 뿐이지.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길들인다면 너는 나에게 있어 단 한 명의 소년이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단 하나의 여우가 될 거야."
"어려워."
단지 여우와 같이 놀고 싶은 것뿐인데. 여우는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명이고 여러 마리인데 어떻게 단 하나가 된다는 것인지 어린왕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원래 완전한 것은 없어. 언어도 그렇지. 말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거야."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지?"
"직접 해보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나를 길들여주겠니?"
"하지만 난 시간이 많지 않아."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나에게는 의미가 없던 것들도 특별해 질 거야. 나는 고기만을 먹어. 저기 보이는 밀밭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 하지만 너의 머리칼은 금발이야. 만일 네가 날 길들여 준다면 나는 이제 저 밀밭을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거야. 나는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야. 저기 보이는 장미들은 내게 너무 시끄럽지. 하지만 너의 입술은 불그스름해. 만일 네가 날 길들여 준다면 나는 저 장미들을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거야. 저기 달려있는 잎사귀들은 아주 작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지. 하지만 네 손은 아주 작아. 만일 네가 날 길들여준다면 나는 이제 저 잎사귀들을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거야."
"나를 떠올리는 것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날 행복하게 해주겠지."
'이 작고 귀여운 여우를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
어린왕자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시간을 들여야 할 거야. 그리고 많이 참아야 해. 처음에는 나를 만져서는 안 돼. 나와 거리를 두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해야 해. 내가 다른 곳을 보더라도, 너를 보더라도 말을 시켜서는 안 돼. 아까도 말했지만 말이란 건 온전히 무언가를 표현할 수 없거든. 오해를 낳을 수 있어. 그러나 넌 매일매일 조금씩 나에게 다가와 앉게 될 거야. 언젠가는 나의 털도 쓰다듬을 수 있겠지. 또 언젠가는 나의 본 모습을 보게 되는 날도 올 거야."
어린왕자는 예전에 살던 별에서 장미꽃에게 하루 종일 말동무가 되어주고 바람을 막기 위해 유리덮개를 씌워주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하는 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럼 오늘은 너를 바라보기만 할게. 대신 너도 나를 자주 보아줘. 나 혼자만 너를 바라보는 일은 조금은 슬픈 일이야."
"알았어."
여우를 처음 만난 날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그 어떤 인형보다도 여우가 가장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 오마주입니다. 어린왕자를 참고하여 썼으며 같은 대사가 있을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여러분이 알고 계신 그것과는 좀 다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피노키오처럼 되고 싶진 않거든요. 정말이에요. 제가 들은 이야기를 해드릴 뿐이에요.
오월의 어린왕자
1
혹시 어린왕자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의 코를 걸고 단언 컨데 그렇게 아름다운 소년은 이 세상에 그 말고는 존재하지 않을거에요. 어떻게 생겼길래 그러냐고요? 그림을 봤는데 잘 모르겠다고요? 그 그림은 좀 못 그린 그림이에요. 전체적으로 그림들이 좀 투박하지 않나요? 아무튼 그래요.
어린왕자의 머리칼은 밝은 태양과 같은 금발이었습니다. 이거 하나는 잘 그렸다고 생각해요. 그의 피부는 장밋빛을 띠고 있는데 웃을 때는 항상 볼이 발그레해집니다. 입술은 좀 더 붉은 장미를 머금은 것 같은 색이고요, 코도 어찌나 오똑한지 정말 멋지답니다. 제가 어린왕자를 그린 그림 중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눈이에요. 그의 눈은 정말 반짝거려서 꼭 우주의 모든 별을 담아놓은 것만 같은 눈이에요. 언젠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어린왕자가 사는 곳에서는 눈을 뜨면 우주를 가득 매운 빼곡한 별들이 눈에 가득 담긴대요. 항상 반짝거리는 별들이 있는 우주를 눈에 담기 때문에 눈이 절로 그렇게 반짝이게 된대요. 지구에서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를 봐야지 비슷하게 될 수 있대요.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눈은 혼탁한 건가 봐요.
말이 나온 김에 어린왕자가 살던 별 이야기를 하자면, 어린왕자가 살던 별은 B-612소행성이었습니다. 그 별은 매우 작아서, 어린왕자는 어떤 날엔 태양이 지는 것을 수차례 보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태양이 지고, 또 다시 지고. 어떤 날엔 태양이 뜨는 것을 여러 차례 보기도 했죠.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태양이 뜨고, 또 다시 뜨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은 그런 정도의 크기였답니다. 앞으로 곧장 가더라도 누구도 멀리 갈 수 없는 그런 곳이요.
가끔 어린왕자가 살던 별 그림을 보고 저 딱딱한 곳에 누워 잔다고? 생각한 분들도 계실거에요. 물론 그렇진 않아요. 어린왕자는 푹신한 침대를 매우 좋아하고 인형을 많이 좋아해서 어린왕자가 사는 별에는 핑크색 포근한 이불이 덮인 침대와, 그 위로 여러 동물 모양의 인형이 있답니다. 하마터면 그 침대 때문에 그 아래 있던 바오밥나무 씨앗을 발견하지 못할 뻔 하기도 했다구요.
어린왕자가 살던 별에는 화산도 있었습니다. 두 개의 활화산과 하나의 사화산이 있었죠. 활화산은 아마 여러분도 알다시피 어린왕자에게 훌륭한 부엌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린왕자는 매일 아침을 화산 분화구를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었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일을 했는데 그러지 않으면 화산이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죠. 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어린왕자 다운 일이었어요.
어린왕자가 살던 별에는 이름 모를 꽃들도 많았습니다. 하나같이 작고 귀여운 것들이었는데 지구사람들은 그것을 들꽃이라고 부릅니다. 그 꽃들 사이로 어느 날 조금 크고, 특이하고, 화려한 꽃이 피었습니다. 새빨갛고 큰 꽃잎이 아침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이 났고, 다른 꽃들과는 달리 어린왕자에게 말도 걸었죠. 처음엔 그 아름다움이 신기해서, 나중엔 그 목소리가 다정해서 그래서 어린왕자는 그 꽃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꽃은 허영심이 많고, 잘난 체 하길 좋아했어요. 요구사항도 많았죠. 다른 들꽃들과 달리 매일 무언가를 요구했어요.
― 물을 좀 더 주지 않겠니? 금세 목이 마르단 말이야.
― 화산을 청소하고 나면 나를 보러와 주지 않겠니? 나 혼자는 심심해.
― 하루 종일 내 옆에서 벌레들을 잡아주지 않겠니?
― 추워. 바람막이를 만들어 줘. 투명한 유리로 된 바람막이어야 해.
― 나는 다른 꽃들과 다르게 특별하단 말이야. 날 특별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구.
바람막이를 해달라고 한 것은 수많은 요구사항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지쳤어요. 어린왕자가 별에서 살며 기억하는 순간부터 그 꽃이 나타나기 전까지 어린왕자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린왕자에게는 꽃과의 대화가 처음이었죠. 그것이 신기하고 소중해서 어린왕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꽃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어요. 그렇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꽃이 너무 버거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린왕자는 꽃과 다투었습니다. 아직 나비가 되지 못한 애벌레 탓에 꽃의 한 쪽 이파리에 작은 구멍 몇 개가 났어요. 꽃은 어린왕자에게 자신을 잘 보살펴 주지 못함을 탓하였어요. 하루 종일 자신의 옆을 지키며 벌레를 쫓아줬어야 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레가 온 것이라고 화를 냈죠. 어린왕자는 꽃의 그런 말들이 자신이 그간 꽃을 아껴주고 챙겨준 마음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죠. 떠나는 날 꽃은 어린왕자가 씌워주려는 유리 덮개를 마다한 체,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얼른 가라고 어린왕자를 등떠밀었습니다. 어린왕자는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지만, 이참에 자신이 살만한 다른 별이 있는지,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있는 다른 별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결국은 어린왕자는 하루에 석양을 마흔 네 번이나 볼 수 있는 자신의 작은 별을 떠났어요.
2
어린왕자가 처음으로 도착한 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이 높은 의자 위에 앉아있었습니다. 옷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털도 달려있습니다. 아마 그게 붉은색의 담피털이었을거에요. 어린왕자는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에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저는 황제입니다."
높은 의자에서 어린왕자를 내려다보는 하얀 피부의 남자는 꼭 어린왕자의 침대 위에 있는 사막여우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그 목소리가 매우 다정해서 어린왕자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한 사람이 마음에 들었어요.
"황제님은 무엇을 하죠?"
"다스리는 일을 하지요."
그가 앉아있는 별은 그 고급스러운 담피털 옷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무엇을 다스리나요?"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모든 것이라면, 이 우주의 별도 모두 다스리나요?"
"물론입니다."
어린왕자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질 못했습니다. 황제는 부드럽게 웃어보였습니다.
"그럼 모든 별에 명령을 할 수 있나요?"
"할 수 있지요."
어린 왕자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그럼 제가 사는 별에도 명령할 수 있나요?"
"그럼요."
황제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얼굴이 아름다워서 어린왕자는 정말 그럴 수 있구나 믿어버렸어요. 어린왕자는 지금 막 떠나왔지만 자신의 별이 그리웠어요. 아마도 석양을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간청을 드리기로 결심했어요.
"황제님 제가 청을 하나 올리고 싶습니다."
"그래요. 말씀해보세요."
"제가 살던 별이 지금 이리로 올 수 있게 해주세요. 너무 그리워요. 그곳의 침대도, 인형도, 분화구도, 그리고….“
어린왕자는 꽃을 떠올렸지만 다른 말을 얼른 꺼내보았습니다.
“석양도요.”
"오 그건 할 수 없어요."
"네? 왜죠?"
어린왕자는 의아했어요.
“그건 당신의 별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별에 명령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명령이야 할 수 있죠. 그렇지만 그것이 불합리한 명령이라면 어차피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내가 당신의 별에게 오라고 한다 해도 그 별은 올 수 없을 거예요.”
어린왕자는 황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령을 할 수 있다고 해놓고는 하지 않는다니.
“황제님은 거짓말쟁이군요.”
황제는 그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저 말이야 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것이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황제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스린다는 것이 무조건 명령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무조건적인 강제를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랍니다.”
어린왕자는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제라고 해도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은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들이 오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요.”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말했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여서 어린왕자는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원치 않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가요?”
“네. 모든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물론 여태껏 마음대로 되어 왔다면 정말 다행인 것이고, 마음대로만 하며 살다 죽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거의 없거나 드물 거예요.”
어린왕자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않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미리부터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살다보면 그런 경우가 오곤 하는데 그 때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고 이겨내다 보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죠.”
“아직은 어려운 것 같아요.”
“맞아요.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 모두 아마 죽을 때 까지 어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살아갈 뿐 인지도요.”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을 떠났어요.
3
두 번째로 도착한 별에는 모자를 쓴 남자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어요.
“와! 나를 찬미하는 자가 오는 구나!”
“저 말인가요?”
“그래 맞아!”
“그 모자는 무엇인가요?”
“나를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 사용하려고 쓰고 있는 거야.”
어린왕자는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며 찬미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환하게 웃더니 모자를 쳐들며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어린왕자는 꺄르르 웃었습니다.
“손에 든 그것은 무엇인가요?”
“아 이거? 이건 마이크야. 나는 노래를 잘 하거든. 그래서 내 별명이 순얼방음이야.”
“순얼방음? 그게 뭐죠?”
“순수한 얼굴에 방탕한 음색이란 말이지. 어때? 멋지지?”
“와.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어린왕자는 방탕한 음색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지만,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궁금했습니다. 자신의 별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 뿐 이었거든요. 두 손을 모으고는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매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청량했습니다. 마치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 마시는 듯, 답답함이 탁 트이는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죠. 남자가 부르는 노래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지만, 어린왕자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여기서 계속 사는 것은 어떨까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가 고개를 얼른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습니다. 그 정도의 노래였어요.
“어땠어?”
“…정말 대단한 노래였어요.”
어린왕자의 칭찬에 남자가 깔깔 거리며 신나게 웃었어요.
“난 내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얼굴이 정말 잘 생겼다고 생각해. 이 우주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자부하지.”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에 두고 온 꽃이 떠올랐습니다. 그 꽃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하루 종일 스스로 칭찬하곤 했는데, 어린왕자는 허영심이 많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저씨는 허영꾼이군요.”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내 생각은 진심이야.”
허영꾼의 당당한 말에 어린왕자는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면서 허영꾼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허영심은 좋지 않아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허영심과 자신감은 구분해야 해. 성급하게 허영꾼으로 재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이야.”
“그럼 아저씨는 허영꾼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어.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칭찬을 바라는 것은 아냐. 그저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든. 나는 다른 건 못해도 그거 하나는 자신 있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어린왕자는 중얼 거리며 자신의 작은 손을 보았습니다.
“저는 손이 작아요. 그래서 항상 분화구를 치우는 일을 할 때 손이 더 컸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이것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누구든 바랄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만으로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워.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빛을 잃게 되는 것 같아. 인간은 저마다 불완전하지. 그렇지만 저마다 다르게 빛나고 있거든. 저 별들처럼 말이야.”
“그렇군요. 저마다 다르게 빛난다.”
“응.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자기 자신도 믿고 사랑해줘야 해. 그걸 알기 까지 나도 너무 오래 걸렸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난 한 걸음 어른에 다가간 것 같거든.”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을 떠났어요.
4
어린왕자가 그 다음 별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테이블에 빈 병 한 무더기와 가득 찬 병 한 무더기를 올려놓고 앉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
남자는 술상에 고개를 박은 채로 대꾸했습니다.
“뭘 드시고 계신 거죠?”
“이건 술이란다.”
“왜 술을 드시고 계신 거죠?”
“후회가 돼서.”
“후회가 된다고요?”
“너는 후회되는 일이 없니?”
“후회되는 일이요?”
어린왕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신의 별에 두고 온 꽃이 떠올랐지만 어린왕자는 고개를 저었어요.
“잘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봐. 사실 후회 되는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술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어린왕자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얼굴에 특이한 점이 있는 남자의 얼굴은 매우 잘 생겼는데 어딘지 아주 슬퍼보였습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후회할 일이 있는 데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더 슬픈 일인지 몰라.”
“후회할 일이 있는데도 후회하지 않는 것….”
어린왕자는 중얼거렸습니다. 어쩐 일인지 장미가 또 떠올라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야 했어요.
“후회를 한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가능한 일이거든. 이 세상에는 후회할 만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니까.”
‘잘못….’
어린왕자는 또 다시 장미가 떠올랐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배워가는 과정인지 몰라.”
“그렇다고 술만 마시면 안 되잖아요. 잘못을 했고 후회가 된다면 그걸 고쳐야죠. 사과를 한다던가!”
어린왕자는 말을 하고는 왠지 가슴이 따끔따끔 거리는 것 같았어요. 어린왕자의 말에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랬습니다.
“네 말이 다 맞아. 고쳐야지.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말이야. 난 너무 부끄러워.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 술은 잠시나마 부끄러움을 잊게 해주는 여러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이란다. 하지만 네 말대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일어나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을 떠났어요.
5
“안녕하세요?”
“천구백구십구 더하기 오 더 하기 이십구는 이천 삼십 삼, 안녕. 이천일 더하시 구 더하기 이십삼은 이천삼십삼… 미안타, 내사 마 바빠가 말할 새가 없다. 오늘내로 다 헤아려야 케가…. 이천삼십삼 더하기 이천삼십삼 더하기 이천삼십삼은 사천육십육….
“뭘 세고 계신 건대요?”
“사천육십육… 어, 별건 아이고 저기 반짝거리는 것들 있제? 그것들 세는 기다.”
“반짝이는 것요?”
어린왕자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주변에는 버섯들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습니다.
“버섯이요?”
“어데 버섯이고. 하늘에 있는 거 말이다.”
어린왕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새까만 우주에 가득한 반짝거리는 별들이 눈에 담겼습니다.
“아 별이요?”
“맞다. 별. 사천육십육개. 휴. 일단은 숨 좀 돌리겠네.”
그렇게 말하고 책상에서 고개를 든 사업가는 어린왕자를 향해 씩 웃어보였어요.
“별을 세서 뭐하시는 건가요?”
“내가 별을 갖고 있거든. 말하자면 소유하고 있는 거다.”
“별을 소유한다고요? 하지만 황제님도 별을 다스린다고 하셨는데요?”
동그란 눈을 하고는 어린왕자가 묻자, 사업가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는 말했습니다.
“그기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소유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다르데이.”
“그렇군요. 그럼 별을 가지고 무얼 할 수 있는데요?”
“흠. 딱히 무얼 하진 않는데. 와 그게 궁금한데?”
어린왕자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 별에는 두 개의 활화산과 하나의 사화산이 있어요. 저는 그것들을 매일 청소하죠. 그리고 제 별에는….”
어린왕자는 자신이 두고 온 꽃을 떠올렸습니다. 어린왕자가 말을 멈추자 사업가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가 걸린 채로 조용히 어린왕자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죠. 어린왕자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 별에는 꽃이 있어요. 그 꽃을 위해 저는 물도 주고, 벌레도 잡아 주고, 바람막이도 만들어 주었죠. 저는 그것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어린왕자의 말이 끝나자 사업가는 흠 하고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았어요. 짧은 순간이 지나고 사업가가 말했어요.
“네 말이 틀린 말이 아이다. 내는 뭐 딱히 별들을 위해서 뭘 하거나, 별을 가지고 뭘 하지는 않는다. 그렇긴 한데….”
어린왕자가 다시금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해보이자, 사업가가 너털웃음을 웃어보이곤 말했습니다.
“내는 그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있다는 게 좋다. 그리고 꼭 별을 가지고 무얼하고, 별에 무얼 해주는 게 옳은 거라고 할 수는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 정답이 없을 수 있다는 기다. 이 세상에 옳고 그른 걸 따질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데이. 훨씬 많은 일들이 그저 선택지로 놓일 뿐 아이겠나.”
선택지로 놓인다니 어린왕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사업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처럼 뭘 하고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그저 숫자 세고, 내거구나 신난다 하는 게 행복한 사람도 있단 기다.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누가 옳고 그르고 그럴 수 없다는 게 그냥 내 생각이다.”
“옳고 그르고….”
어린왕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려웠어요.
“비약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뭐 다른 사람 생각도 존중해 주고, 그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행복하다면 그 방법이 나랑 다르더라도 그렇구나 해주고, 뭐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아니겠나. 나만 무조건 옳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는 거지. 내는 그래 생각한데이.”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을 떠났어요.
6
다섯 번째로 어린왕자가 도착한 곳은 그 전에 갔던 모든 별들 중 가장 작고, 심지어는 자신의 별보다도 훨씬 작은 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가로등 하나와 그 옆에 서있는 점등인 한 명 있었는데 점등인이 서있을 만큼의 공간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왕자는 발뒤꿈치를 잔뜩 올리고는 겨우 서있었죠.
“안녕하세요.”
“안녕. 좋은 아침이야.”
점등인은 그렇게 인사하고는 바로 전등을 껐습니다. 어린왕자가 놀라서 주변을 더듬기도 전에 좋은 저녁이야 하는 인사와 함께 불이 켜졌습니다.
“피부가 까맣네요?”
“태양에 끄슬려서 그런다. 하도 떴다 졌다 해싸니까… 잘잤나?”
점등인은 또다시 불을 끄며 말했습니다.
“어 왜 불을 켰다 껐다 하죠?”
“낮과 밤이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점등인은 불을 켰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원래 그렇다. 여가 너무 작아가 해가 일분에 한 번 뜨고 그 다음 일분에 지고 이칸다.”
그렇게 말하고는 점등인이 씩 웃어 보이더니 불을 껐습니다. 점등인의 웃는 얼굴로 보이는 날카로운 덧니가 인상적이라고 어린왕자는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지금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점등인 덕에 어린왕자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근데 계속 이런 식이면 너무 힘들지 않나요?”
“힘들긴 한데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뭐 나름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괘안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점등인은 또다시 불을 껐습니다.
“그래도 많이 힘들겠네요.”
“니도 니가 사는 데서 일하고 그카지 않나? 다 똑같은기지 뭘. 매일 매일 하던 일이 있을 거 아이가.”
불이 또 다시 켜졌습니다.
‘매일 매일 하던 일?’
어린왕자는 매일 아침 분화구를 청소하던 일, 꽃에 물을 주던 일, 바오밥 나무 씨앗이 있는지 살피는 일 등을 했던 나날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매일 매일 하는 일이 있었어요.”
“다행이네. 매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행운이지.”
불이 또 다시 꺼졌습니다.
“성실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다를지 몰라도….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건지도 모르지.”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어린왕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을 떠났어요.
7
어린왕자가 여섯 번째로 도착한 곳은 그동안 갔던 곳들 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별이었어요. 지금까지 보았던 별들 중 가장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웅장한 별이었죠.
“어! 탐험가세요?”
어린왕자를 보자마자 책상에 앉아있던 앳된 남자가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탐험가는 아니에요.”
“아 그러시구나 아쉽네요.”
“이 별은 무척 아름다워요.”
“전 잘 몰라요. 저는 지리학자거든요.”
드디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고 어린왕자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지리학자인데 자신의 별도 모르다니요.
“지리학자인데 이 별이 아름다운지 모르나요?”
“이 별엔 탐험가가 없거든요. 뭐 어쩔 수 없죠.”
“그럼 지리학자는 뭘 하는데요?”
“탐험가를 만나서 그 여행에 대해 질문하고 기록을 하죠.”
“기록이요?”
“네. 뭐 어디는 산이 몇 개고, 강이 몇 개고, 바다가 있고 없고 뭐 그런 거요.”
“그런데 이 별엔 탐험가가 없다고….”
“그래서 다른 별에 대한 기록이 많아요. 보실래요? 아 그 전에 그럼 살던 별 얘기 좀 해주세요.”
“아 제가 살던 곳에는 활화산 두 개랑 사화산 한 개가 있구요, 꽃이 있어요.”
“꽃은 기록하지 않아요.”
“왜요? 하지만 엄청 아름다워요.”
“그건 일시적이거든요.”
“일시적이라고요?”
“네. 금방 없어진단 거죠.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금세 없어질 거라서. 기록해 봤자 종이 낭비에요.”
“하지만….”
어린왕자는 자신의 꽃을 떠올렸습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는 일이 많았지만 어찌됐건 그 꽃만이 어린왕자에게 말을 걸어주고, 대화를 나눴거든요. 꽃과의 일을 떠올리자 어린왕자의 반짝이는 두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런 꽃이 일시적이라니. 금방 없어진다니. 자신이 별을 떠나온 일이 어린왕자는 그제서야 조금씩 후회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
그것을 본 지리학자는 당황해 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지리학자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기를 써요. 그 꽃은 제 지리학 연구보단 당신의 일기에 어울리네요.”
“일기요?”
“매일 매일 있었던 특별한 일들을 적는 거죠. 뭐, 꼭 그 날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쓰는 거예요.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 같은 걸요.”
어린왕자는 일기에 대해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것이 궁금해졌습니다.
“당신도 일기를 쓰나요?”
“아 나는 바빠서.”
“아 네.”
어린왕자는 금세 시무룩해졌습니다. 어린왕자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습니다.
“어느 별에 가보면 좋을까요?”
“지구에 가보세요. 거기가 가장 지리학적으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죠. 어떤 이유에서든 다녀오면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