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x윙 동화합작
By 미미
너와 나는 내일도
1
짙은 밤하늘에 박혀 반짝이는 별, 나를 비추는 달, 그 모든 것을 감추는 구름.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나는 오늘도 춤추듯 발걸음을 뗐다. 풀 내음이 살랑이고 2월의 바람이 내 귓가를 간지럽혀 나는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다. 그 무엇도 이만큼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한켠에선 그 아름다움을 내치고 더욱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으라고 소리친다.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름다움…
초록빛을 띄는 별똥별이 하늘을 가른다. 아주 어렸을 적에 딱 한 번 별똥별을 봤었기 때문에 나는 벌떡 일어나 별똥별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무작정 달렸다. 나와 별똥별이 거의 수직을 이룰 때 즈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별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빛의 주인이 별이 아닌, 원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함께 왔다는 것도.
소년은 원석과 함께 물속에 잠긴 채 서서히 가라앉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땅에 완전히 닿지 않고 살짝 떠있을 정도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조심스레 그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이 닿자 밝게 빛나던 원석의 초록빛이 없어지고 소년도 털썩 내려앉았다. 순간적인 변화에 놀라 나도 모르게 소년의 심장께에 귀를 댔다. 묘하게 울리는 진동과 심장박동 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소년의 목에 걸려있는 원석을 살펴보자 무언가 서툴게 흠집이 나있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긁은 듯한 느낌에 나는 달빛에 비추어 그것을 읽었다.
라이관린
나는 이것이 소년의 이름이라고 확신했다. 단 하나의 근거도 없이, 막연하게.
2
조율을 이루는 듯한 새소리와 따스하게 내려앉는 햇빛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나 이불에 얼굴을 부비며 여운을 즐겼다. 잠깐, 여기 어디지?
" 일어났어? "
낯선 공간과 사람. 찬물을 끼얹은 듯 잠이 확 달아났다. 잠에 취해 부드러웠던 표정이 경계심에 확 구겨졌다. 그런 내 표정을 본 남자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 아, 여기는 우리집이야. 나는 박지훈이고 네가 어제 정신을 잃고 있길래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어서 데려온 거야. 나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야. "
아아- 나 어제 도망쳤지. 목걸이를 훔쳐 달아나다가 걸려서 비행선에서 떨어졌었지. 어, 분명 떨어졌는데?
" 나 그냥 쓰러져있었어? "
" 너 하늘에서 내려오던데, 그 목걸이랑 같이. "
목걸이. 역시 이 목걸이는 진짜였구나. 안심과 동시에 불안함이 나를 덮쳤다. 그들이 분명 나를 잡으러 올 거야. 그들은 분명 나를 찾아낼 거야.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쨌든 빨리 여기를 떠나야겠어.
" 이제 나도 너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
" 뭔데. "
" 너 이름이 뭐야? "
" 없어. "
" 거짓말. 이름이 없는 건 이 세상에 없어. "
짜증 나게 일어나자마자 쨍알쨍알. 그래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니까 짜증 속에 남은 친절을 짜내어 답해주었다.
" 나 이름 없어. 부모님도 몰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버려졌어. 보육원에서는 날 5살까지만 키우고 돈 많은 귀족 저택에 하인으로 팔아넘겼어. 그래서 나는 이름이 없어. "
보통 이 정도로 말하면 동정하는 얼굴로다가 물어봐서 미안하다 따위의 말을 하는데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 정말? 그럼 내가 네 이름을 지어줄게! "
" 뭐? 난 이름 필요 없어. "
" 라이관린으로 하자, 넌 이제부터 라이관린이야. "
어이가 없다. 누구 마음대로?
" 난 이름 필요 없다니까. "
" 아침 먹자 라이관린. 내가 방금 열매 따왔어. "
하-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이제 떠날 테니까.
" 내 거는 필요 없어. 나 지금 갈 거야. 고마웠다. "
그리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온 얼굴에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주렁주렁 달고는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표정을 구겼을 때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 필요 없는 말들을 이어붙였다.
" 아니, 계속 너한테 신세 질 수도 없고 난 지금 쫓기는 신세라서 계속 이동해야 돼. 그리고 나 원래 아침 안 먹어서 안 먹는다고 한 거야. 진짜야, 어? "
" 왜 쫓기는데 "
죽일 듯이 노려봐서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인으로 속해있는 귀족 집안에서 라퓨타를 찾기 위해 떠나던 중에 나는 목걸이를 훔쳤고 소형 비행선을 훔쳐 달아나려 했지만 도중에 발각됐다는 것. 발각된 후 당황하여 발을 헛디뎌 비행선에서 추락했다는 것, 그리고 곧 그들이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나를 찾아올 거라는 것.
" 왜 훔쳤어? "
" 그들의 것이 아니니까. 그들은 라퓨타에 가면 안 돼. 지금 남아있는 목걸이는 이거 하나야.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를 찾아내기 전에 이 목걸이를 라퓨타에 돌려놓고 올 거야. "
" 왜? 그냥 숨겨놓으면 되잖아. "
" 그들은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깊은 바닷속이든 동물의 뱃속이든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야. 이게 없으면 라퓨타를 찾을 수 없어. 그러니 나는 이걸 라퓨타에 반드시 돌려놓아야 해. 어차피 이 물건은 라퓨타의 것이니까. "
" 왜 사람들이 라퓨타에 가려고 하는데? "
" 거긴 영생을 주는 열매가 있어. 그걸 먹으면 병들지도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사는 거야. 그들은 욕심이 아주 많아서 자신들이 영생을 얻은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고도 할 생각이야. 난 그걸 막아야 해. 그들은 그걸 악용할 거야. "
그는 물음을 멈추고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물었다.
" 사람들은 왜 영원을 살려고 하는 거지? "
" 죽음이 두려우니까. "
" 왜? "
" 죽으면 점점 잊혀지니까. 소중한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어니까. 삶이 즐거우니까. 이유는 많아, 하나로 정의할 수 없어. "
" 너는? 넌 영원을 살고 싶어? "
" 나는… "
난 누군가의 기억에 없고 소중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하루하루가 지옥 같기만 하다. 그런 나에게도 영원을 살고 싶냐고 물으면 난 당연히,
" 응. 나도 영원을 살고 싶어. "
영원을 살고 싶다고 답할 것이다. 언젠가 나도 행복해지겠지,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겠지, 나도 언젠가는 내일이 기다려지겠지. 이따위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니까.
" 하지만 나는 영생을 주는 열매를 먹지 않을 거야. 난 생각보다 겁쟁이거든. "
" 왜? 설마 영생을 주는 대신 동물로 변할까 봐 그런 거야? "
" 푸하하, 뭐라는 거야. 난 영생을 살 자신이 없어. "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버렸다. 어차피 더 이상 안 볼 사이라고 말하는 건 변명인가. 아, 어쩌면 사람은 정말 깊은 사이인 사람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을 더 드러낼지도 모른다. 금방 헤어지고, 또 쉽게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인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나도 너랑 같이 갈래. "
" 뭐? "
" 너 따라갈래. 나 그 목걸이를 둬야 하는 곳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어. "
" 거짓말 치지 마. 길을 알고 있는 건 목걸이뿐이야. "
박지훈은 내 말을 무시하고 작은 가방에 조금의 먹거리와 책 한 권을 챙겼다. 그런 박지훈을 향해 다소 거친 말투로 그를 타일렀다. 박지훈은 그런 나를 무시하더니 짐을 다 챙기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뗐다. 천천히 그의 입이 열리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나는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줄만 알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녹빛 눈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여태 본 적이 없어서 나의 시간이 잠시 멈춰질 정도였다. 공기엔 박지훈의 아름다움만이 맴돌았다.
" 라이관린. "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목걸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이 세상에 마법의 원석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 말고도 남아있다면, 아직 존재한다면. 그건 분명 박지훈의 눈동자일 것이다. 원석보다도 빛나는 그의 눈동자로 라퓨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해 버렸다. 사람을 교만에 빠뜨리고 마는 그 아름다움이, 대체 뭐길래 이성적인 판단까지 앗아가는지.
나는 그 아름다움에 이성을 져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휩쓸려버렸다.
" 여기가 라퓨타야. "
뭐?
" 그 목걸이는 있어야 할 위치가 따로 있어. 우린 지금 거기에 가는 거야. "
충격에 회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가 라퓨타라고? 목걸이가 알려준다는 게 이런거였어? 알려주는 게 아니라 데려다주는 거잖아. 내가 기절했을 때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가. 그럼 날 쫓아오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따라왔을 거야. 그들도 지금 라퓨타인 건가? 그러면 어떡하지?
" 같이 가자. 서둘러야 돼. "
그는 나보다 작고 통통한 손으로 내 손등을 단호하게 잡아 이끌었다. 그의 따뜻한 손의 감촉에 멍했던 정신이 확 들었다.
" 박지훈. 넌 왜 여기 있어? "
" 여긴 원래 왕국이야. 사람이 사는 건 당연해. "
" 근데 지금은 왜 너 혼자인 건데. "
" 떠났어. 더 아름다운 달을 찾기 위해서. "
그렇구나. 너도 버림받았구나. 너도 혼자구나. 난 그에게 왜 너는 떠나지 않았냐고, 너는 왜 더 아름다운 달을 찾기 위해 가지 않았냐고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잔인하고 무례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만큼은 상냥해지고 싶었다. 그가 나와 같은 처지라서? 글쎄. 그냥 그의 눈동자가 빛나기 때문에, 정도로만 정의하자.
3
"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데. "
" 거의 다 왔어. "
그놈의 거의 다 왔어. 벌써 3번째다. 차라리 멀었다고 하면 희망은 품지 않을 텐데.
" 근데 왜 거기 갖다 놔야 돼? "
" 갖다 놓아보면 알아. "
" 넌 왜 다 숨기냐? 얼마 남은 지도 안 알려줘, 왜 갖다 놓아야 하는지도 안 알려줘. 원래 사람은 동기가 있어야 더 열심히 "
" 숙여! "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자 거짓말처럼 귀족들의 비행선이 나타났다. 정말 따라왔구나. 잊고 있었던 공포가 떠올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박지훈은 어떻게 안 거지? 기척도 나지 않았는데. 내가 박지훈을 빤히 쳐다보자 박지훈은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작게 속삭였다.
" 비행선이 오면 바람소리가 달라져. "
바람소리. 답이 참 박지훈다워서 그냥 웃어버렸다. 박지훈도 나를 따라 웃었다. 방금까지의 공포와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감정만이 내 몸을 휘감았다. 박지훈의 눈동자는 확실히 마법을 부리는 원석일 것이다.
"가자. "
박지훈과 함께라면 영원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거의 도착했다는 말이 이번에는 사실인지 큰 건물이 하나 보였다. 몇 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도착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 근데 그 사람들은 왜 목걸이를 계속 찾는 거야? 어차피 라퓨타에 도착했잖아. "
" 우린 여기서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치는 라퓨타는 그냥 풀숲일 뿐이야. 하지만 목걸이가 있다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지. 그래서 더욱 목걸이를 찾는 거야. "
" 그럼 너는 그 목걸이가 없으면 내가 보이지 않겠네? "
" ... "
이 애는 왜 자꾸 나를,
" 있잖아, 나는 네 눈만 봐도 알 수 있어. "
시험에 들게 하는 것 같지.
" 라이관린. 지금 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
이번에도 겁이 많은 나는 침묵으로 자리를 지켰다. 아, 도망친 건가. 박지훈은 말없이 걸어가는 내 옆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속삭이는 그에게 나는 거절도 수락도 아닌 침묵을 주었다. 비겁하게.
지훈아, 나에게 있어 사랑이 뭔지 아직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와 좀 더 함께 있으면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그때까지 날 좀 더 기다려줘.
4
멀리서 볼 때는 그냥 큰 건물 같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그 모양새가 정교해 성 같은 분위기가 더 많이 났다. 마치 왕족이 살 것만 같은 그런 성. 박지훈은 문을 열어야 한다며 성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기억이 났다는 듯 성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 라이관린! 열리나 잘 봐봐! "
내가 듣지 못할 새라 큰 소리로 외치는 폼이 영 귀여웠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은 열리다가 말아서 그 사이로 지나가진 못할 것 같았다. 힘으로 열어보려고 억지로 끙끙대는데 멀리서 박지훈이 다시 소리쳤다. 아 조금만 더 하면 열릴 것 같은데.
" …린! 라이관린! 도망쳐! "
옆을 보자 박지훈이 전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가 나에게 뛰어오는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비행선이 내 머리 위로 나타났다. 순식간에 비행선에서 사람의 팔 모양을 연상시키는 기계가 내려와 내 몸을 감싸 들어 올렸다. 가까워지던 박지훈이 또다시 점점 더 멀어졌다. 안돼, 안돼.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 라이관린! "
네 눈동자가 햇빛을 받고 더욱 선명한 녹빛을 띄었다. 나는 또다시 그 눈동자에 매혹됐다. 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목걸이를 꽉 쥐었다.
" 꼭 다시 너를 찾으러 갈게 "
힘을 주니 목걸이는 줄이 끊겨 쉽게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를 향해 목걸이를 던졌다.
" 이번에는… "
그가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나의 손에서 목걸이가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아름다운 동화 같던 라퓨타의 성과 장식들, 박지훈은 사라졌다. 나에겐 또다시 잔혹한 소설만이 흐른다.
" 이 쥐새끼 같은 놈이! "
가차없는 폭력이 흘렀다. 예전의 나는 이렇게 무차별한 폭력을 당할 때 고통에서 피어난 분노가, 굴복으로 인해 낭떠러지로 떨어진 자존감이, 정의나 도덕 따위는 져버린 세뇌만이 남았는데. 똑같은 고통, 혹은 그보다 더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지금의 나는 어째서 희망만을 품고 있는 것일까.
'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나는 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를까
" 목걸이 어디 갖다 놨어. "
" 나의 라퓨타에. "
실실 웃으며 말하니 구둣발로 얼굴을 걷어차였다. 그대로 머리채가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햇빛도 들지 않는 방에 나를 쑤셔놓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난다. 자꾸만 그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 손을 잡아끌던 작고 따뜻한 손이, 마법처럼 빛나던 녹빛 눈동자가 떠오른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데도 나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감정의 방울로 행복을 적실 까. 내 물음에 끝을 맺기도 전에 호선을 그리던 입가는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툭, 툭 내려갔다.
라이관린. 지금 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어.
사랑한다고 할 걸. 망설이지 말고 그때 사랑한다고 말할 걸. 사랑 따위를 몰랐다. 지금도 나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를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행복이 피어오르고 또 주책맞게도 과거를 후회하고 과거의 나를 증오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하며 슬픔이 흐른다. 이 모순된 감정 사이에 그와 함께하는 미래, 혹은 그가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희망을 꿈꾸는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원석보다도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그는 반드시 라퓨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을 때처럼 나는 그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5
며칠을 맞고 고문당했다. 지독한 놈들이라 몇 날 며칠 잠을 재우지 않을 때도 있었고, 죽지 않을 만큼 맞기도 했다. 다른 일들은 그냥 생략하겠다. 아무튼 제대로 먹을 것을 주지도 않고 잠도 재우지 않아 나는 쇠약하고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나는 박지훈을 찾아갈 것이다. 그게 1년 뒤든, 5년 뒤든, 10년 뒤든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끼익-
다시 문이 열렸다. 나는 이제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너를 찾아 기억을 헤매면 되는 거다. 나는 이 악몽이 두렵지 않다고 속으로 수없이 되새기고 있을 때, 초록빛 원석이 홀로 들어오고 문이 닫겼다. 목걸이의 끈이 끊어진 부분을 매듭으로 묶어놓아 다시 목에 걸 수 있었다. 목걸이가 점점 다가와 나의 목에 걸렸다. 그리고, 꿈같던 네가 보였다.
“이번에는… ”
" 이번에는 내가 너를 찾아갈게.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를 품 안에 안으려 했지만 나는 걷지 않은지 꽤 됐기 때문에 한 걸음 채 가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 나는 돌아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너의 따뜻한 품이 나를 감싸 안아 고통 대신 기쁨이 내려앉았다.
" 지훈아, 지훈아. "
" 라이관린.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슬픈 말도, 고통스러운 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 가슴을 후벼파는지 나는 통 몰랐다. 나의 심장을 파내서 진심을 엿보려 하는 건지, 나는 박지훈에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썩어빠진 나의 진심을 너에게 토해냈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내 진심이 아무리 썩어빠졌어도 너에게 닿으면 마법처럼 살아나니까. 너는 그렇기에 더 빛난다.
" 사랑해. 아직 사랑이 뭔지도 잘 몰라. 그래서 계속 외면하기만 했어. 하지만 난 너를 사랑한다고 확신해. 사랑이 뭔지 모르는 내가 너를 사랑해. "
그의 앞에서 나는 아이로 돌아간 듯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쓰다듬고는 등을 돌려 나를 업었다. 나보다 작은 그의 등과 손이 다부졌다.
" 가자. 관린아. "
그는 나를 업고 미로 같은 이 비행선에서 한참을 걸었다. 무겁지 않냐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이미 너무 뻔해서.
" 내가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
" 그럼 넌 영원을 살아야 될 걸? "
지훈아. 나는 계속 겁쟁이일지라도, 예전의 내가 느끼던 두려움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어둠, 폭력, 고통. 나는 이 모든 것이 두렵지 않아. 내 두려움은 그저, 그저 네가 나와 함께한 미래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야.
" 너와의 영원이라면 두렵지 않아. "
신기하게도 이 두려움은 너와 함께라면 떠오르지 않아. 나, 조금은 용감해진 걸까?
" 목걸이를 빼앗아! "
박지훈이 타고 온 비행선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 그들이 목걸이를 걸고 도망치는 나를 발견했다. 박지훈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당황해했지만 곧장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작은 비행선에 몸을 구겨 넣어 출발했다. 박지훈의 비행선은 박지훈이 며칠을 밤새워 라퓨타의 것들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몸을 완벽히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우리의 뒤를 소형 비행선 몇대로 쫓아왔다.
" 어떻게 쫓아올 수 있는 거지? "
" 네 모습은 지금 저들에게 보이니까. 지금 너는 공중에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걸? 마법을 써서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동해봐! "
이 상황에서 농담이 잘도 나오는 듯 박지훈은 꺄르르 거리며 비행선을 운전했다.
" 근데, 너 어떻게 비행선을 만들었어? "
" 나도 더 아름다운 달을 찾기 위해 함께 가려고 했어. 그 과정에서 비행선은 수도 없이 만들었지. "
" 왜.. 떠나지 않았어? "
내가 물어봐도 될까. 그의 상처를 내가 들쑤시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 달은 어차피 하나뿐이라는 걸 너무 빨리 알아버렸거든. "
박지훈이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하지만 별은 수없이 많아. 난 긴 기다림 끝에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별을 찾았기 때문에 행복해. "
아아,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6
성에는 금방 도착했다. 박지훈이 만든 비행선은 그들이 가진 소형 비행선보다 빨랐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었다. 우리는 박지훈이 애써 만든 비행선을 내팽겨처버리고 그전보다 조금 더 많이 열려있는 성문을 통과하였다. 미로 같은 길을 전력으로 달렸다.
" 저 새끼 잡아! "
바짝 쫓아오는 그들에게 금방이라도 잡힐 듯했다. 이번에 잡히면 정말로 죽는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려 곧 넘어질 것 같았다. 오직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여 쉴 틈 없이 두 다리를 혹사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고 넘어졌다. 나 말고 박지훈이.
" 난 어차피 그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까 너 먼저 가! 이제 저 앞 코너만 돌면 돼. "
박지훈은 넘어지자마자 나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정말 내가 잠시라도 멈추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쫓아오고 있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난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분명 박지훈을 업은 뒤 뛰었을 테니까. 지금의 내 몸 상태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잊은 채로.
내가 언젠가 박지훈에게 앞으로 내가 할 일, 겪게 될 일을 질문할 때면 박지훈은 항상 그랬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박지훈의 말이 맞았다. 나는 박지훈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 목걸이가 가야 할 위치를 단번에 알아챘다. 수많은 원석들이 박혀있는 벽에 딱 하나의 원석의 자리만 남아있었다. 저기구나. 난 그곳을 향해 마지막으로 뛰었다. 폐가 말라비틀어져서 찢어질 것 같아 멈추고 싶어도 나는 달렸다.
탕-
본능적으로 옆으로 움직여 총알을 피했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옆으로 쓸리듯이 넘어졌고 그대로 나는 그들에게 잡혔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어둠 속에 익숙해 빛을 잊었을 때. 나에게 마법처럼 빛나는 네가 왔듯이 이번에도 너는 나를 구하기 위해 나에게 달려왔다. 유일하게 너를 볼 수 있는 나는 너와 눈을 마주치고 살짝 웃어보았다. 괜찮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인한 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너는 나에게 오던 걸음 멈추고 다시 전력으로 벽 쪽으로 뛰었다. 그리곤 벽에 속삭였다.
" 멸망하라. "
박지훈의 녹빛 눈이 선명한 빛을 뿜으며 빛났고 그 빛으로 하나의 빈자리는 메꿔졌다. 갑자기 지반이 심하게 흔들리자 당황하여 그들은 나에게서 힘을 잠깐 풀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지훈에게 뛰어갔다. 박지훈의 일렁이던 녹빛 눈은 어느새 사라지고 갈빛 눈만이 그에게서 빛났다.
" 나 조금 왕자님 같았어? "
박지훈은 항상 진지하고 위험한 상황에 이렇게 농담을 던지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긴장하여 딱딱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풀리고 심장이 편하게 뛰곤 한다. 그는 나에게 늘 마법을 부린다. 그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들의 눈에도 이제 라퓨타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지 건물이 무너져내린다며 뛰쳐나갔다. 건물 사이로 들어온 식물들도 모두 시들어버리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건물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목걸이의 원석이 빛을 뿜으며 우리를 감싸 안았다. 우리에게 보호막이 생긴 것처럼 주변의 모든 위험에서 보호받았다. 박지훈과 손을 나란히 잡고 걷다 보니 점점 발이 뜨면서 라퓨타에게서 멀어졌다. 박지훈과 나는 공중을 걸으며 한참을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이 따라오는 건 아닌가 겁이 났을 때 뒤를 돌아보니 라퓨타의 잔여물에 비행선의 모터가 고장 났는지 비행선은 라퓨타와 함께 분해되며 추락하고 있었다. 그게 그들의 끝이구나, 하며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7
목걸이는 나와 박지훈을 낯선 땅으로 데리고 갔다. 조금 걸어가다 보면 마을이 있고, 조그만 시장이 있는 그런 곳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어둑해져 다음날부터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밤하늘을 마주 보며 나란히 누웠다.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 중 가장 빛나는 녹색 별을 보며 내가 먼저 입을 뗐다.
" 네 눈동자는 원래 갈색인 거지? "
" 그런가 봐. 왜, 별로야? "
" 아니. 나에게 있어 넌 참 아름다워. 녹빛 눈을 깜빡일 때면 살랑이는 벚나무가 떠오르더니,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 마냥 너의 갈빛 눈은 또 새롭게 아름다워졌네. "
" 겨울이 오면 무슨 색일까? "
나는 빛나던 녹색 별에게서 눈을 떼고 박지훈의 옆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래, 밤하늘보다 아름다운 것이 내 옆에 있었지.
" 라이관린. 나는 이때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 네가 내려온 그날 밤 나는 확신했지.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
박지훈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간지러운 바람에 그의 목소리가 춤추듯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 나는 네가 아름답기에 그저 너를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의외로 단순하고, 허점이 많았어. 내가 정의했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지.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너와 함께하고 싶었어. "
맞아, 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그저 어느 귀족의 하인이었을 뿐이었지.
" 이제는 완벽히 안다고 자만할래. 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넌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사랑이 뭔지 잘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아. "
바람이 멈추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랑이야. "
아름다움은 정의되지 않아. 무수하게 빛나는 원석 중 하나처럼.
우리는 그날 밤 목걸이를 땅에 묻었다. 이제 더 이상 목걸이는 필요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커다란 나무가 목걸이가 묻힌 자리에서 솓아올라있었다. 푸르른 나뭇잎 사이에 가장 크고 맛있어 보이는 열매를 따서 박지훈과 나누어 먹었다. 박지훈은 라퓨타의 열매와 맛이 똑같다며 놀라워했다.
" 우리 이거 먹으면 여기서도 영원을 사는 거 아니야? "
" 글쎄, 살아보면 알겠지. "
우리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조그만 일에도 웃으며 집을 지었다. 집을 완성할 때까지 열매만 먹어도 충분했기 때문에 따로 먹을 것을 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집을 완성한 뒤로 그 나무에서 열매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영원을 얻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보면 찬찬히 알게 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박지훈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리가 함께하는 어느 곳이든, 우리에겐 라퓨타일 것이라고.
8
살을 찢을 것 같던 바람과 생명체를 찾기 힘든 꽁꽁 언 땅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녹아 봄만을 기다리는 지금은 2월이다. 아직 바람이 차기에 몸을 떨면서도 봄을 떠올리는 그런, 겨울도 봄도 아닌 그런 계절이라고 나는 정의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얘기한다. 겨울과 봄이 만나는 계절이라고.
차갑고 무의미했던 나는 겨울이고 그런 내가 따뜻하고 희망만이 차있는 너를 만나 우리는 2월이라는 계절이 되었다고 내가 네게 전하니 너는 모두 그저 2월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모두 겨울과 봄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자신도 모르는 봄이, 모두가 모르던 겨울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기에. 늘 밝기만 할 줄 알았던 너는 매일 밤 얼어붙은 가슴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기만 한 나는 네가 과일을 사갈 때면 어느 누구보다 즐겁게 대화를 이어 거래를 하곤 한다.
나는 언제나 2월은 봄만을 기다리는 계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2월은, 그대들의 2월은 기다림뿐만 아니라 만남 역시 담겨있다. 그래야 완전한 2월이니까.